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5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5과 애국 할머니 조신성

나효선 2015. 5. 30. 21:42

기독교대한감리회 2015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5과 애국 할머니

조신성

 

* 성경봉독 : 마가복음 5:25~34

* 참고성경 : 마태복음 4:18~22

* 요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마가복음 5:34)

  

  

서론

5월의 인물은 조신성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비참한 생활을 그대로 감내해야 했던 이 땅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이 만남으로 그의 삶은 완전하게 변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수동적인 삶에서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삶으로 바뀌어 교회와 사회를 이끌고 지도하였습니다.

그의 주체적 삶은 처음에는 교육을 통한 애국활동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3·1운동을 경험하면서 보다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투쟁방법으로 전환하고 일제에 저항하였습니다.

  

 

본론

조신성은 1867년 평북 의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여유 있는 집안 형편 덕에 독선생을 두고 한문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친이 사업에 실패하고 산속으로 들어가면서부터 불우한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16세에 시집을 갔으나 3년이 못되어 남편이 죽고, 시집 식구들의 학대가 도를 넘어서자 결국 이를 참지 못하고 가출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1897년경 의주교회에 출석하면서 장로교 선교사 베어드를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베어드 선교사의 주선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시모노세키의 바이코여학교와 요코하마 사범학교 심상과를 졸업하였습니다. 1901년에 이화학당 교사로 부임해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민족정신을 주입시키는 데 헌신하였습니다. 학생들과 매일 같은 시간에 수업을 중단하고 나라를 위한 기도모임을 가졌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강탈한 때였고, 교회와 학교에서도 이를 반대하는 시위나 집회가 끊이지 않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도회를 열었을 뿐 아니라 88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대한문 앞에 가서 엎드려 통곡하며 국권상실의 슬픔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1908년에는 평양으로 거처를 옮겨 여메례의 후원으로 진명여학교를 설립하고 여성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에 앞장섰습니다. 친히 돌을 머리에 이고 날라 학교 담을 쌓는 등 정성들여 가꾸던 학교는 합방 이후 일제의 잔악한 방해공작에 부딪혀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이후 그는 대동강 부근 농촌교회에 전도사로 나가 전도하면서 여성계몽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다가 3·1운동을 경험하면서 항일투쟁방법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비폭력·무저항주의로 저항하던 만세시위가 일제의 잔혹한 무력탄압 앞에 너무나 힘없이 무참하게 무너지는 현실을 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투쟁방법을 보다 적극적인 것으로 전환하였습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김구 안창호 등과 비밀리에 연락을 하면서, 자신이 돌보던 평남영원 덕천 맹산 지역의 교회를 돌아다니며 군자금을 모금해 상해로 보내었습니다. 1920년 11월에는 만주 유하현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의 영원 덕천 맹산지구 지하조직인 ‘맹산독립단’ 창설에 참여하였습니다. 맹산독립단은 맹산군 선유봉 호랑이굴에 본부를 두고 인쇄기 3대와 활자 등을 사들여 사형선고문과 협박장, 경고문 등을 인쇄해 일본관헌과 친일파들에게 보냈으며 재산가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우편물호송대를 습격해 탈취한 송금을 상해임시정부에 보내는 단체였습니다. 그도 가슴에다 육혈포, 탄환, 다이너마이트를 품고 다녔으며, 수시로 변장을 해가며 깊은 산속을 며칠씩 헤매고 생식으로 버티는 등 갖은 고생을 다해야 했습니다. 같은 해 11월 18일에는 독립운동가들과 영원으로 가던 중 일본인 순사 3명의 불심검문을 받아 체포될 위험에 처하자 그중 무장한 순사를 끌어안고 뒹굴어 독립운동가들을 도피하게 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영원경찰서에 공무집행 방해죄로 구금되어 유치되어 있던 중 그를 감시하던 조선인 순사 나신택 예준기 두 명을 설득하여 이들로 하여금 맹산독립단에 가입케 하였습니다.

 

1921년 10월, 상기 공무집행방해죄로 인한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던 날 맹산독립단 관련사건에 연루된 것이 탄로나 다시 수감되었습니다. 조신성을 비롯한 19명이 연루되어 재판을 받은 ‘맹산 선유봉 호랑이굴 독립청년단사건’은 당시 동아일보에 자세히 보도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습니다.

      

평양형무소에서는 ‘대한애국부인회사건’으로 체포된 최매지 박승일 이성수 최영보 안신행 등과 같은 방에서 생활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에 감방 교회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습니다. 이들은 주일만 되면 변기통 위에 올라서서 창살 밖으로 보이는 교회 종탑을 바라보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1927년 5월 27일 신간회 자매조직인 ‘근우회’가 조직되자 조신성은 60세의 나이로 평양지회의 회원 확보 및 조직에 나서 1928년 1월 30일 평양지회를 조직하였고, 같은 해 7월에는 임시전국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평양지회장으로 선임된 그는 평양지회 창립기념식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강단을 치며 다음과 같은 개회사를 하였습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가 글쎄 무엇입니까? 우리나라를 요 꼬라지로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하세 일하세 젊어서 일하세. 늙기 전에 빨리 일하세’하는 정신과 노력으로 우리 민족이 합심해 나가야 소원이 성취됩니다.”

 

근우회 평양지회는 근우회 회관을 설립하고, 여성들에게 경제 의식을 일깨우고 실업여성의 직업 확보를 위한 실행사업으로 속옷공장 설립을 기획하는 등 추상적인 여성운동이 아닌 현실적인 여성운동을 기획하고 실천하였습니다. 1930년경 근우회 본부가 해체된 이후에도 평양지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 후 야학 활동에 참여하였고, 무산아동을 위한 학교도 설립하여 운영하였습니다.

 

해방 후 신탁통치 문제로 한창 시끄럽던 1945년 11월 27일 ‘북조선여성동맹위원장’이라는 직책을 제시하는 공산당의 제의를 거부하고 월남하여 서울에 정착하였습니다. 서울에서는 대한부인회 부총재, 재남 조선민주당 고문 등의 직분을 맡아 해방 후 여성 민족운동의 방향을 잡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난 가서 가난하게 살다가 신망애 양로원에서 1953년 5월 5일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결론

조신성은 수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는 초기의 개인적 가정적인 불행을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 극복하였습니다.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 그는 이후 민족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하여 후학들을 깨우쳤습니다.

그러나 교육활동의 한계를 절감한 후부터는 일제에 저항하는 직접적인 투쟁활동에 나섰습니다. 그는 독립군의 군자금을 마련하거나 총을 드는 무장투쟁도 마다하지 않았고, 근우회 등의 조직을 통한 현실적인 경제적 실천활동도 지도하였습니다. 이 같은 활동으로 끊임없이 고난을 당했지만 독립운동을 향한 희망을 결코 놓지 않았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개인적인 불행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2.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도울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5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Ⅲ

            

  

사진 출처 : http://cafe.daum.net/rlaqudg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