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5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3과 교육운동가
장용하
* 성경봉독 : 히브리서 12:10~13
* 참고성경 : 이사야 40:1~5
* 요절 :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브리서 12:12~13)
서론
3월은 한민족이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독립의지를 과시하기 위해 거국적으로 3·1운동을 일으킨 달입니다. 한국교회와 교인들도 이 운동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적극 참여하여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전통을 수립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기독교는 외래종교라는 비판적 인식에서 민족종교라는 호의적 인식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번 달에는 ‘장용하’라는 인물을 살펴봅니다. 그는 학생으로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독립선언서를 외국 공사관에 전달하는 비밀 임무를 맡았고, 만세시위에도 동참하였습니다. 독립운동에 관한 인쇄물을 만들어 일반인을 계몽하는 일도 계속하였습니다. 결국 이 일로 그는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본론
1900년 4월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장용하는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3·1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학생입니다. 당시 배재에서 성경을 가르치던 김진호 전도사는 ‘독립선언서’를 서울 시내의 각국 영사관에 전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배재에서 이 일을 도울 믿을만한 제자들을 골라냈습니다. 이렇게 부름 받은 장용하는 독립선언서를 3월 1일 중국영사관에 비밀리에 전달하고 그 날 오후 탑골공원에서 열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습니다. 훗날 그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습니다.
“3월 1일 정오 오포소리를 신호로 해서 중국영사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그리고 바로 광화문 쪽으로 와서 탑골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달려오는 사람들과 합류하였다. 날씨는 좋았고 따뜻해서 길거리에 있는 집 문 앞에는 부인네들이 물동이를 내다 놓아주어서 목마른 사람들은 물을 꿀꺽꿀꺽 마신다. 불란서영사관을 거쳐서 덕수궁을 들려 진고개로 들어섰다, 지금까지는 손을 대지 못하던 일본 경찰이 발동한다. 기마대가 와서 때리고 잡고 한다.” (1970년)
당시 학급 반장이던 장용하는 이후 하숙집에서 동기생인 김기진 이봉순 염형우 등과 <조선독립신문>을 등사판으로 인쇄하여 민가에 배포하였습니다. 4월부터는 제호를 <반도의 목탁>으로 바꾸고 배포를 계속하다가 4월 27일 동지들과 같이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종로경찰서에 연행된 장용하는 주모자로 몰려 갖은 고문을 당하였고, 몸 전체가 부을 대로 부어서 독립운동 유인물 제작과 배포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이 일로 그는 2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 후 복교하여 1921년 3월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에 건너가 아오야마학원 영어사범과에 입학하여 1925년 3월에 졸업하였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모교의 부름을 받고 4월에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였습니다.
그 후 교사로 근무하던 그는 신흥우 교장의 사임으로 1941년 7월 20일 교장 직무대행으로 임명되었고 1943년 2월 23일에 정식으로 제7대 배재중학교(1938년 일제의 개정조선교육령에 따라 교명 변경, 5년제) 교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일제 말기 위기의 시대에 그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배재를 지켜내는 일이었습니다. 일제는 ‘만세학교’로 불리던 배재를 없애려 하였기에 학교를 지켜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민족의식이 강한 그로서는 굴욕을 감수하면서 일제의 정책에 순응하는 것이 참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그는 배재를 지켜냈습니다.
해방이 되었지만 학교는 혼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장용하 교장은 해방을 맞자 임시휴교를 선언하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 후 가을학기가 시작되는 9월 1일부터 수업을 재개하였지만 학내 갈등과 혼란은 오히려 본격화되었습니다. 학교를 지키기 위해 친일 교육과 행사를 수용했던 교장과 교사에 대한 거부 움직임이 일어났고 결국에는 장용하 교장이 책임을 지고 9월 30일 물러났습니다.
교육계를 떠나 10년 동안 실업계에 종사하던 장용하는 1955년 12월 다시 배재의 교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이후 장용하는 배재 교육을 현대화하는 공헌을 하였으며, 미 감리회 선교부로부터 정동의 배재학당 재산의 소유권을 정식으로 이양받고 ‘재단법인 배재학당’ 설립인가를 받아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재산 이양식은 1957년 10월 14일 미 감리회 해외선교부 브럼보 총무를 비롯하여 배재 출신 이승만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습니다.
장용하는 배재학당 설립자인 아펜젤러 선교사 때부터 꿈꾸어 왔던 배재대학 설립을 위한 기초도 마련하였습니다. ‘배재대학설립기성회’를 조직하여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 13만 평의 대학 부지를 확보하였고 교사 기공식도 거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순조롭게 진행되던 배재대학의 꿈은 4·19 학생혁명이 일어나면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장용하는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에 지나치게 의존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5월 30일 교장직을 사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배재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해결할 행정력이 필요했기에 “전교 전학년 전학생들의 열의적인 소원과 전체 교직원의 간곡한 희망과 이를 반영하는 학교관계 각계의 진정과 재단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장용하는 1961년 1월 16일 다시 교장에 부임하여 자신이 추진했던 일을 마무리할 기회를 얻었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학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사임을 학교 신문 <배재신문> 35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작년 5월 우리의 뜻하지 않은 분규로 인하여 일시 학교를 떠나시게 되매 학교 발전에 많은 영향이 있었고, 다시 선생님을 모시게 됨으로써 우리에게는 다시 광명이 비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러 어려운 문제 처리에 있어 또 다시 불의의 사정으로 인하여 학교를 떠나시게 되니 우리들의 실망도 크려니와, 선생님께서 학교의 발전과 학생들의 실력향상을 보시기 전에 사임하시게 됨에 대하여 학생, 학부형, 동창들의 애석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장용하는 1968년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1978년 9월 15일 별세하였습니다. 감리교 장로로 정동제일교회와 자교교회에서 헌신하였습니다.
결론
장용하는 감리교의 개척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선교학교인 배재학당과 일생을 함께하였습니다. 학생 때에는 학생기독교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3·1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일본에 유학하여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모교의 교사와 교장으로 근무하면서 배재학당의 발전이란 꿈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특히 1957년에는 학교 재산의 소유권을 미 감리회 선교부로부터 넘겨받아 재단법인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재정적 기초를 든든히 하였고, 교사를 건축하는 등 배재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그의 꿈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나라를 위해 교인들이 민족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실현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우리교회나 주변에서 나라사랑을 위해 헌신한 후손들을 찾아보고
그들을 기억하고 돌보기 위해 할 일은 무엇일까요?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5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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