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5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4과 임시정부의 대부
이동녕
* 성경봉독 : 빌립보서 4:10~13
* 참고성경 : 에스라 9:6~9
* 요절 :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립보서 4:12)
서론
우리나라는 여러 차례 침략을 당하였지만 굴하지 않고 민족의 정통성을 이어왔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신앙의 힘으로 민족운동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이동녕도 그런 사람입니다.
이동녕은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를 만남으로 자신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킨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신앙을 통해 나라와 민족을 발견하였고 이에 대한 사명도 잊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항일운동의 맨 앞에 서는 위험하고 긴장된 삶이었지만 신앙인으로서의 자신을 돌아보며 늘 회개하고 반성하던 분이었습니다.
본론
이동녕은 1869년 9월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10세에 사서삼경을 통달하였으며, 1892년 24세에 국가시험인 응제진사에 합격하였지만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898년 독립협회 사건으로 이승만 등과 함께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 직후에는 <제국신문>에 예리한 시선으로 논설을 기고하여 애국계몽과 민권고취에 앞장섰습니다. “민족 자강의 방도” “나라를 구하는 길” 등의 논설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려 개혁의 대열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또 나라의 장래가 관료의 손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태로운 시각임을 지적하고 현대에는 주인공이 국민임을 명백히 규정하여 ‘국민참정권’을 적극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후 1904년 상동교회에 출석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는 전덕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그의 신앙과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전덕기 목사는 그에게 신앙의 횃불을 밝혀준 고마운 분이었기에 자신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전덕기 목사를 대할 때면 늘 존경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리고 상동교회 엡웟청년회에 참석하며 상동파 민족운동가들과 독립운동에도 본격적으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1905년 11월 엡웟청년회 연합회가 상동교회에서 모임을 갖고 을사늑약의 무효화 운동에 나서기로 결의하자, 이동녕은 ‘죽음으로 독립을 지키다’ 라는 뜻으로 혈서를 쓰고 대한문 앞에 엎드려 조약 무효의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일본 헌병의 무지비한 진압으로 무산되었고 이동녕은 체포되어 두 달 동안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 후에는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북간도 용정촌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이상설 여준 정순만 박무림 등과 함께 용정에 우리나라 최초의 항일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교포교육과 독립운동 인재양성에 힘썼습니다. 1907년 귀국하여 4월 경 전덕기 양기탁 이동휘 이갑 유동열 안창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 중앙회 총서기로 활동하면서 자매단체인 청년학우회 총무로도 활약하였습니다. 또한 대성학교와 오산학교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고, 상동교회에서 설립한 상동청년학원 교사로도 재직하였습니다.
1909년 봄 양기탁의 집에 모인 신민회 간부들은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벌이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만주 지역에 제2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에 이동녕 이회영 주진수 장유순 등이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 근거지를 물색하고 돌아왔습니다. 그해 10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이후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신민회는 해외와 국내로 나뉘어 투쟁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 결의에 따라 1910년 말부터 1911년 초까지 그를 비롯한 이회영 형제들과 이상룡 김창환 여준 등 100여 명의 가족들이 서간도 요령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망명하였습니다. 1911년 4월 항일독립단체이자 한인교포들의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열었습니다. 경학사는 이후 부민단, 한족회, 서로군정서로 발전하였고, 신흥강습소는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동녕은 신흥강습소 초대소장에 취임하여 독립군 양성과 교포교육에 전력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만주와 노령에서 이회영 이시영 황공달 문창범 황상규 이범윤 김좌진 박찬익 윤세복 김동삼 여준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3·1운동 직전인 1919년 1월 무오독립선언서를 내외에 선포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수립의 주역으로 활약하였고 4월 11일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에 추대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의 법적 절차를 원만히 밟았습니다. 국호는 대한민국, 연호는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이라 하였고 관제를 의결하고 나서 전문 10조로 된 임시헌장을 선포하는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이동녕은 임시의정원을 통하여 5회에 걸쳐 법안을 수정 보완하였으며, 내각책임제인 국무총리제의 선거과정과 인선절차를 민주적으로 진행함으로써 한국의 헌정사를 빛내고 있습니다. 곧 이어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이 되어 임시정부의 기초 작업에 착수하였고, 정부의 기구가 확고해지자 그해 10월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와 ‘남녀학생에게’란 제목의 밀서를 국내에 반포하였습니다.
이후 이동녕은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우리나라 의회민주정치의 제도적 장치 마련과 실행을 진두지휘하였습니다. 그는 세 차례나 의정원 의장을 맡았고, 각부 총장, 국무총리, 국무령, 대통령대리, 주석 등을 역임하면서 맡겨진 직책을 성실히 수행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침체의 늪에 빠져 갖은 곤경과 시련, 좌절, 방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진로 모색에 분주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이 시기 이동녕은 명실상부한 임정의 최고 영도자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하나도 동지들의 단결이요, 둘도 동포들의 단결이요, 셋도 모든 한민족의 대동단결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힘을 한 데 뭉쳐 겨레와 나라 앞에 모든 것을 바치고 희생해야 할 각오가 서야 하겠습니다.” 라며 민족진영의 대동단결을 읍소하였습니다. 1935년 11월 항주에서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말년에도 노구를 이끌고 민족 역량의 집결을 위해 포고문을 몇 번씩 발표하는 등 높은 통일의지를 보였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임시정부의 외곽 연합단체인 ‘한국광복진선’ 결성에 참가하여 항일전에 투신하였고, 1939년에는 김구와 전시내각을 구성하고 포고문을 발표하고 조국광복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는 민족진영의 대동단결과 광복운동의 일원화를 유언으로 남기고 1940년 3월 13일 사천성(四川省)에서 급성폐렴으로 별세하였습니다. 장례는 임시정부 국장으로 거행되었고, 1948년 9월 유해를 봉환하여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하였습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습니다. 2005년에는 충청도 천안 목천의 생가를 보수 정비하여 개방하였고, 2010년에는 생가 건너편에 ‘석오이동녕기념관’도 설치하였습니다.
결론
김구 선생이 ‘우리 민족의 선각자이며 우리 혁명운동계의 도사(導師)이시다’고 말했듯이 이동녕은 상동교회 출신의 신앙 인맥으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 위에 우뚝 솟은 분입니다. 그는 상동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인 민족운동에 나섰습니다. 그 후 국내활동이 어려워지자 북간도로 이주하여 독립을 위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동포들을 교육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3·1운동 이후에는 임시정부수립을 주도하였고, 이후 20년 동안 임시정부의 법통을 수호하면서 조국광복을 이루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때로는 주석, 국무총리, 국무위원으로 역할하면서 구국의 십자가를 졌던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주역이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독립운동에서 주도적으로 역할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2. 우리나라가 직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 기독교인들이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5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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