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5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2과 교회교육 활동가
김폴린
* 성경봉독 : 마태복음 28:16~20
* 참고성경 : 디모데전서 4:11~13
* 요절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20)
서론
김폴린은 교회교육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분입니다. 이분의 삶을 통해 믿음생활의 기초와 유산이 얼마나 소중한 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는 전설적인 전도부인 전삼덕의 손녀로 신앙의 전통을 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전달받은 신앙을 확산하는 교육활동에 직접 나섰습니다.
김폴린은 전도대에 참여하여 백성을 깨우치는 활동에 나선 이후 절제운동을 하였고, YWCA운동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총리원 교육국과 감리교신학교에서 교회학교 교육을 지도하며 교회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또 여선교회 활동과 평신도 활동에 헌신하였고 한국 감리교의 설립에도 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본론
김폴린은 1898년 4월 평남 강서의 농촌에서 태어났습니다. 폴린은 세례명 ‘바울’을 여성명사화한 것으로 한자로는 ‘보린’(保麟)입니다. 그가 출생한 가정은 신앙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진 집안입니다. 할머니인 전삼덕은 서북지방 여성으로서는 제일 먼저 세례를 받았고 세례 후에는 전설적인 전도부인으로 활동했으며 강서읍교회와 함종교회, 숭덕학교를 설립한 분입니다.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김폴린은 일찍부터 기독교학교에서 교육을 받아 1915년에는 이화학당 중학과, 1919년에는 이화학당 대학부(예과)를 졸업하였습니다. 1920년 6월에는 ‘이화7인 전도대’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이화7인 전도대’는 홍에스더 김활란 김함라 윤성덕 김애은 김신도와 김폴린 등 이화학당의 교사와 학생 7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처럼 민족을 위해 필요한 때에는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과 우리 민족이 잘사는 길과 건강, 교육, 사회, 경제를 개선시키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화7인 전도대’는 평양 신의주 선천 안주 곽산 정주 북진 양시 차령관 강서 등 북쪽 지역을 돌며 전도 사업과 계몽운동을 함께 전개했습니다. 전도대가 활동하는 마을마다 좋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강연의 내용이 민족정신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일제의 심한 제재를 받아야 했고 마침내는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1923년 대학과를 8회로 졸업하고 그해에 이화학당 교사로 부임하였으며,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한 절제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교인들의 절제생활은 선교 초기부터 강조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 이후 술 담배 아편 등이 널리 퍼지고 공창까지 생기면서 한국인들의 정신까지 피폐화되자 신앙적·도덕적 차원뿐 아니라 민족운동 차원에서도 이를 금지하려는 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입니다.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던 금주·금연 운동은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범교회적이고 전국적인 절제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감리교는 1921년 각 지방에 순회강연대를 파견해 금주운동을 폈으며, 1923년부터 매년 10월 첫째 주일을 ‘전조선 절제주일’로 정하고 그날 헌금은 절제사업에 사용하게 했습니다. 조선기독교절제운동회, 금주단연동맹 등 기독교 단체들이 조직되어 강연회와 가두선전 등을 펼치면서 금주와 금연은 한국 개신교를 상징하는 생활습관으로 확고해졌습니다. 김폴린은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연합회의 서기, 연합위원 등의 임원으로 절제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1929년과 1930년에는 미 감리회 여선교회 총회의 임원(부서기)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1931년에는 미국에 유학하여 일리노이 주 에반스톤의 내셔널대학에 입학하였다가 1933년에 졸업하였습니다. 그 후 귀국하여 1934년부터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원 교육국 주일학교 간사로 일하면서, 주일학교의 계단공과 유치부와 유년부 교과서를 집필하였고, 1936년에 조직된 총리원 여자사업부의 서기로 선임되어 감리교의 여성사업을 지도하였습니다. 1939년 다시 미국에 유학하여 일리노이 주 노스웨스트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에서 수학하였습니다.
해방 후 1946년 서울 여자기독교청년회(YWCA) 총무로 선임되어 유치원, 공민학교 등의 사업을 실시하였고, 전쟁 미망인을 위한 재봉 사업을 지도하는 한편 경기도 소사 지역의 부녀자들을 상대로 신용조합을 조직하였습니다. 1947년 그는 다시 미국으로 유학하여 내슈빌 주 스카리트여자대학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하였고 계속해서 내슈빌의 피바디대학에서 일반 교육학을 연구한 후 귀국하였습니다.
이후로 서울의 감리교신학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여성교육과 기독교교육에 참여하였습니다. 특히 신학생들의 현장 실습을 강조하였던 그는 1955년 감리교 본부에서 활동 중이던 스탁튼 선교사와 서울 남산교회의 주일학교를 시찰한 후 주일학교의 혁신적인 개혁에 착수하였습니다. 김폴린과 남산교회 관계자와 교사들은 먼저 주일학교의 문제점을 찾아낸 후 교육위원회 구성, 교실 보수와 시설 확장, 교사 훈련, 교과과정과 시청각교재 확보, 공개수업 등의 개혁 과정을 진행하였고 남산교회 주일학교는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러한 학생 중심의 주일학교 활동은 “주일학교 활동”이란 제목의 한글과 영문으로 인쇄되어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 알려지게 하였습니다.
1949년 캐나다에서 열린 세계기독교학생대회에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1952년 미국 감리교 총회와 1958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기독교교육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습니다. 1958년 한국 여자기독교청년회 연합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연합회 교육부장(1957~65년), 기독교교육협회 공과작성위원, <새가정> 편집위원, 기독교서회 편집위원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1990년 10월에 열린 감리교 ‘자치60주년 기념대회’에서 한국 감리교회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표창을 받았습니다. 그는 1930년 미 감리회 특선위원으로 선정되어 북 감리회와 남 감리회를 통합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를 형성하는 과정에 참여하였고, 창립총회에 참석한 회원 중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하였습니다. 말년에도 정동제일교회 권사로 믿음을 지키면서 「예배법」(1987), 「주님이 함께한 90년」(1989), 「한국 기독교 교육의 역사」(1992)를 집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이다가 백세를 두 달 앞둔 1996년 10월, 9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결론
김폴린은 이어받은 신앙 유산을 증거하는 데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그는 한국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을 외면하지 않고 해결하려고 노력했기에 전도인, 교육 실무자, 사회운동가, 교수 등 다양한 모습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바탕은 언제나 기독교 신앙이었기에 겉모습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이어받고 자신을 변화시킨 기독교 신앙을 잊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는 감리교의 평신도를 대표하는 인물로도 역할 하여 1930년 남북 감리교회가 하나 되어 한국 감리교회로 형성되는 데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그리고 그치지 않는 학문에의 열정으로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고, 이러한 그의 활동으로 한국 기독교교육의 역사가 정리되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우리교회 교육현장은 어떠한 지를 알아봅시다.
교회교육을 위해 남선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2. 우리가정의 신앙족보와 신앙유산을 찾아봅시다.
선조들이 남긴 사진, 글 등의 신앙적 유품들을 모아보고,
어떻게 하면 후손에게 신앙유산을 잘 전할지 이야기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5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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