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인왕산 수성동 계곡 병풍바위 글씨 윤동주 하숙집 터

나효선 2014. 8. 19. 05:00

전철유람 173

인왕산 수성동 계곡 · 병풍바위 글씨 · 윤동주 하숙집 터

 

무더운 여름!

나는 요즘 가까운 곳을 다니고 있습니다.

인왕산을 바라보며 20년 살았던 나는

수성동 계곡이 복원되어서 쉽게 갈 수 있어 좋습니다.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가서 종로09번 버스를 타고

종점인 ‘옥인아파트’에서 내리면 바로 인왕산이 다가옵니다.

 

인왕산 수성동 계곡(仁王山 水聲洞 溪谷)

 

수성동(水聲洞)은 조선시대 ‘물소리가 유명한 계곡’이라 하여 그렇게 불렸다고 합니다.

               

 

 

                          

수성동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 대가인 겸재 정선(1676~1759)의 작품

시내와 암석의 경치가 빼어났던 인왕산 기슭 수성동 계곡 골짜기를 그린 그림이다. 수성동 계곡에는 안평대군이 살던 터인 비해당(匪澥堂)이 있었고

기린교로 추정되는 다리가 있다.

 

겸재 정선의 작품 ‘수성동(水聲洞)’ 그림과 복원한 수성동 계곡

 

                                     

 

 

계류(溪流)

수성동 골짜기에 흐르는 시내

 

                     

오른쪽에 사모정

 

 

                                     

‘착한 데이트’를 하는 청춘

 

             

인왕산 병풍바위 글씨

 

 

널따란 바위에 무언가 새겨진 것이 있다는 것을 작년에 알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인왕산 병풍바위에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이라는 글씨를 새겼던 흔적이라고 합니다.

 

           

≪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은 최근 발간한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하늘재 펴냄)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을 발굴하고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근대사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인왕산 병풍바위에는 1939년 일제가 '동아청년단결'이라는 글씨를 새겼던 흔적이 남아 있다. 동그라미 안에 글씨를 새겼다가 다시 깎아낸 듯한 흔적이 보인다. /하늘재 제공

 

인왕산 절벽 암반 위에는 일제가 최후 발악을 하던 때 새겨 놓은 ‘대동아청년단결(大東亞靑年團結) 황기(皇記) 2599년 9월16일 남차랑(南次郞) 운운’ 이라는 문구가 그냥 남아 있는데, 이번 서울시에서는 민족정신 앙양과 자주정신 고취에 미치는바 영향이 많다고 하여 82만원을 들여 삭제 공사를 추진 중이라 하며 3월 말까지는 끝날 것이라. 조선일보 1950년 2월 25일 ≫

 

 

                  

치마바위

글씨가 새겨진 병풍바위 아래에 주름진 치마 모양의 바위가 있습니다.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 이야기가 담겨있는 치마바위!

≪ 신씨는 스스로 궁궐을 나가 인왕산 아래 옛날 살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녀는 궁을 나오며, 살아있는 동안 인왕산 바위에 붉은 치마를 걸어 남편을 그리워하겠다는 약속을 남겼습니다.

그 후 그녀는 매일 아침 일찍 인왕산에 올라 중종과 함께 살던 때 자주 입었던 붉은 치마를 널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이 궁궐의 중종에게 전해지자 임금도 자주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쪽을 바라보며, 신씨를 그리워했습니다.

인왕산 치마마위는 애틋한 사연이 있는 바위 ≫

 

범바위

작년에는 이 바위가 무엇인지 몰랐는데

얼마 전 안산 정상에 올라서 바라본 범바위의

다른 쪽 모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교(木橋)

 

 

 

 

   

옥인시범아파트 흔적

 

 

 

청계천 발원지

   

 

 

 

 

 

이름 모를 꽃!

 

 

암벽등반?

 

 

인왕산 수성동 계곡 안내도

 

                     

기린교(麒麟橋)

   

 

             

≪ 조선시대 안평대군의 옛 집터에 있었던 '기린교(麒麟橋)'로 추정되는 돌다리가 종로구 옥인동 옥인시범아파트 옆 계곡에서 최근 발견됐다.

서울시가 철거할 예정인 이 아파트의 옆 계곡 암반 벽 사이에서 발견된 돌다리는 가로 세로 약 35㎝, 높이 3.7m의 장대석 두 개를 붙여 만들었고 다리 폭은 70㎝ 정도다.

수평으로 놓은 다리이면서 교각이 없는 독특한 양식으로 소박하면서도 품위가 있으며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2009년 9월 14일 ≫

서울시 기념물 31호

 

 

 

 

                                 

윤동주 하숙집 터

 

수성동 계곡에서 아래로 조금 내려가면 나옵니다.

 

 

 

                 

윤동주 연표에

≪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기숙사를 나와 북아현동,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이때 그는 친구 라사행과 함께 정지용 등을 방문, 시에 관한 토론을 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해 《소년(少年)》지에 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

아버지 함자가 나옵니다.

나는 이 하숙집이 아버지와도 관련이 있는 줄로 알고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윤동주 님은 이 누상동 하숙집에서는 1941년에 하숙생활을 했고

아버지 라사행 목사님은 어머니 조문사 장로님과

그 해 4월 1일에 결혼하셨습니다.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맛집에 가서 사기도 하고

통인시장 구경도 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신명기 8장 6, 7, 1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