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4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4과 개화기의 신여성
하란사
* 성경봉독 : 요한복음 10:7~15
* 참고성경 : 히브리서 12:10~13
* 요절 :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서론
4월의 인물은 개화기의 신여성 하란사(河蘭史)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가두는 한계를 뛰어 넘었습니다. 여성에 대해 억압적인 당시 봉건적인 사회구조를 바꾸는 일에 스스로 모범을 보였습니다. ‘후처’란 신분적 제약에 당당하게 맞서면서 사회활동을 하였고, 자신이 공부한 신학문을 소외된 여성들에게 가르쳐 여성해방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녀는 열정과 도전정신을 가졌습니다. 직접 선교사를 찾아가 이화학당 입학을 요청하였고, 젖먹이를 떼어 놓고 낯선 곳 미국으로 유학하여 한국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귀국하여서는 가르치는 일을 하며 여성의 권익을 높이는 일과 독립운동에 적극 나섰습니다.
본론
하란사는 1875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정부 관리인 하상기의 후처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생활의 여유로움에 안주하지 않고 당시 개화의 물결을 받아들여 시대를 선도하는 여성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하란사는 도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896년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된 이야기가 이를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녀가 여성을 위한 신교육 기관인 이화학당에 입학하려고 지원하였으나 기혼여성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어느 날 밤, 이화학당 프라이 교사를 찾아갔습니다. 입학을 요청하면서 프라이 교사 앞에서 자신이 가지고 갔던 등불을 입으로 훅하고 불어서 꺼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캄캄하기를 이 등불 꺼진 것과 같으니 우리에게 학문의 밝은 빛을 열어 줄 수 없겠느냐” 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녀의 열정에 프라이 교사가 감동하여 입학을 허락했다 합니다. 그 후 그녀는 기독교인이 되었고, 세례를 받으면서 이름을 ‘란사’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이름은 영어 이름 ‘낸시’를 한자로 바꾼 것입니다. 성도 남편을 따랐기에 이때부터 ‘하란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900년에는 일본에 유학하여 1년 동안 공부하다 귀국하였고, 1902년에는 미국 유학길에 오릅니다. 당시 젖먹이가 있었지만 새 세상을 향한 학문의 열정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유학 자금을 받아 순조롭게 공부를 계속하여 1906년 웨슬리안대학을 졸업하고 문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 일로 1908년 고종에게 훈장(은장)을 받는 영예도 차지했습니다.
귀국 후에는 스크랜턴(M. F. Scranton) 대부인이 상동교회 안에 세운 영어학교의 교사가 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전도부인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주로 과부나 기생 같은 불우한 형편의 여성들과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기혼여성들이 공부하는 학교였습니다. 이 학교는 몇 년 후 성경학교로 바뀌었다가 협성여자신학교, 감리교신학대학교로 발전하였습니다. 오랜 관습과 전통을 깨고 기혼여성으로 일본 미국에 유학했던 그녀로서는 큰 보람을 느낄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영어와 성경 등을 가르치는 교실 안의 교사에 그치지 않고 학생들과 함께 거리에 나가 전도하는 행동하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녀는 불우한 환경에 놓인 여성들을 깨우쳐 한국감리교회 초기에 여성 지도력을 발휘하도록 하였습니다.
1910년 9월 이화학당 안에 대학과가 신설되어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이 실시될 때 그녀는 유일한 한국인 교수로 참여하였습니다. 기숙사 사감도 맡아 편지를 일일이 검열할 정도로 엄격하게 훈육하여 ‘호랑이 사감’이란 별칭도 얻었습니다.
하란사는 교육 현장에서뿐 아니라 강연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습니다. 1907년 진명학교 주최로 열린 집회에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연설을 하였으며, 자혜부인회에서 주최한 집회에서는 당대의 이름난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연설을 하였습니다. 1911년에는 영문으로 발행되는 선교 잡지에 당시의 지도급 인물인 윤치호의 글을 반박하는 글을 싣기도 하였습니다.
“다음 사실만은 꼭 알아두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정규 고등학교 졸업생이 그저 요리나 바느질하는 법을 알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그 학교들의 목적과 방향은 슬기로운 어머니, 충실한 아내 및 개화된 가정주부가 될 수 있는 신여성을 배출하는 것이지 요리사나 간호원, 침모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정동제일교회에 출석한 하란사는 감리교회 평신도 지도자로 활동하였습니다. 특히 1916년에는 한국감리교의 평신도 대표로 뉴욕에서 열린 미감리회 총회에 참석하여 한국여성 평신도의 역량을 과시하였습니다. 총회가 끝난 후에는 미국 전역을 돌며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연설을 하여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강사비와 교포들의 기금을 모아 1918년 정동제일교회에 한국 최초로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하게 했습니다. 이 파이프 오르간은 근대 음악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전도와 교육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 3·1운동 때는 파이프 오르간 몸체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기도 했습니다.
또 하란사는 민족운동가로도 활약했습니다.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 정동제일교회 손정도 목사와 이필주 목사의 영향을 받았고, 미국 여행을 통해 당시 국제정세를 인식했기에 시대적 과제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그녀는 덕수궁을 드나들며 고종과 엄비의 자문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고종과 선교사와의 연락을 매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를 신임한 고종은 궁중 패물을 군자금으로 주어 의친왕과 함께 나라 밖 일을 착수하도록 계획하기도 했습니다. 또 특히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일제 만행을 폭로하는 고종의 밀지를 파리강화회담에 전달하는 비밀 계획을 수행하려 했으나 1919년 1월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는 바람에 무산되었습니다. 하란사는 고종이 승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북경으로 건너갔지만 그곳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도착 직후 교포들이 그녀를 위해 마련한 만찬회에 참석하여 먹은 음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하고 온 선교사 벡커(A. L. Becker)는 그녀의 시체가 검게 변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세간에도 일본 스파이로 활약한 배정자가 그녀를 미행했다는 소문이 나돈 것으로 보아, 그녀의 죽음이 단순한 병사가 아니라 독살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문을 갖게 했습니다. 그녀의 공훈을 기려 1995년 애족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결론
하란사는 시대의 제약을 극복하고 교회와 나라가 요구하는 사명을 제대로 감당한 여성입니다. 어린 나이에 양반의 후처가 되었지만 가정이란 울타리에 안주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재능을 계발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그녀가 도전하자 닫혀 있던 문이 열렸고, 이화학당과 정동제일교회를 통해 신학문과 새 세상을 배우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여성들에게 전하는 선각자가 되었습니다. 불우한 처지의 여성들을 깨우치고 교회와 나라를 위해 나서게 하였습니다. 식민지 한국의 상황을 바꾸는 일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비록 자신은 이 일로 의문의 죽음을 당했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한 밑거름이 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제약들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고 이를 어떻게 극복할지 말해 봅시다.
2. 가정과 교회에서 남녀의 권리와 평등이 어떻게 실천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4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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