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4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3과 수원 민족운동의 중심 김세환

나효선 2014. 3. 30. 00:20

 

기독교대한감리회 2014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3과 수원 민족운동의 중심

김세환

 

* 성경봉독 : 로마서 13:11~14

* 참고성경 : 출애굽기 3:7~12

* 요절 :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롬 13:11)

 

 

서론

3월은 민족의 독립을 위한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된 달입니다. 이에 민족운동에 헌신한 김세환(金世煥)을 소개합니다. 김세환은 교회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한 수원이 낳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먼저 교육운동을 일으켜 수원 지역 근대교육의 중심 인물이 되었습니다. 수원상업강습소와 삼일여학교의 교사로 활동했으며, 폐교 직전의 학교를 되살렸습니다.

또 김세환은 민족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의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이란 명예를 차지하였습니다. 그 후에는 사회운동, 신간회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수원이란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민족과 교회의 진로를 모색하는 일에 자신을 바친 분입니다.

 

 

본론

김세환은 1888년 수원 남수동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소년 시절부터 수원교회(수원종로교회)에 출석하여 착실한 기독교인으로 성장했고, 교회의 영향으로 교육가와 독립운동가의 꿈을 키웠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관립 외국어학교에 진학하여 공부하고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중앙대학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귀국하였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김세환은 수원상업회의소가 “상업에 의한 지식, 기능의 강습”을 목적으로 설립한 수원상업강습소(화성학원, 수원중고등학교)에서 직조감독관, 소장으로 일하면서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는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교훈을 몸소 실천하는 교육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1913년에는 밀러(Lula A. Miller) 여선교사에게 발탁되어 삼일여학교(현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에 학감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교사 신축, 양잠 실습장 설치 등 학교 발전을 위해 크게 활동했을 뿐 아니라 자주 자리를 비우는 교장을 대신하여 학교 살림을 도맡아 관리하였습니다. 밀러 교장의 보고서에 기록된 그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원여학교는 우리의 자랑입니다. 학교는 우리의 유능한 학감 선생 지휘 하에 꾸준한 발전을 보이고 있습니다. 내가 한국을 떠날 때 학교 부지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아름다운 나무 그늘로 덮여 있었습니다. 많은 나무와 꽃들을 옮겨다 심었고 새로 산책로도 냈습니다. 우리 교사 김 씨는 학교 건물 벽에 도드라진 한국 지도를 조각해 붙임으로 방문객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또 학교 앞 쪽에 흐르는 개울 위로 다리를 놓아 장마철에도 학생들이 건널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김세환의 활동으로 삼일여학교는 탄탄한 기반을 구축하였고, 지역사회에서도 좋은 학교로 소문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학감으로서의 역할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에는 ‘요시찰 인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학교 밖에서도 학교를 위해 일하였습니다. 1940년 선교사들이 한국을 떠나면서 삼일여학교가 폐교 위기에 처하자 수원 지역 유지들을 설득하여 학교 운영 자금을 지원케 함으로써 학교가 유지되도록 하였습니다.

 

김세환은 1919년 3·1운동에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습니다. YMCA간사인 박희도에게서 지금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고 있으므로 조선 독립을 할 때라는 말을 듣고 3·1운동을 계획하는 단계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그가 민족대표 33인에 들지 못한 것은 독립운동이 일회적인 운동이 아니고, 제2·제3의 운동으로 이어져야 하며, 또 제1선에서 희생자들을 뒷바라지하는 이들도 있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것보다 빛도 없이 뒤에서 활동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입니다. 경기 충청도의 운동 책임자로 선임된 그는 김병제 목사(홍성교회)와 동석기 목사(남양교회)를 설득하여 민족대표로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3월 1일에는 서울로 올라와 파고다 공원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였고, 식이 끝난 후에는 군중들과 만세를 부르면서 종로 무교정 경성일보사 앞까지 행진하였습니다. 그 후 숨어 지내다가 3월 13일에 체포되었지만 김세환은 조금도 위축되거나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단한 자신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밝히며 재판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세계대세로 합방이 되었다 하더라도 항상 가슴 속에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모든 물건을 대할 때 초목에서 흐르는 이슬도 눈물이나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래에 정정당당히 조선사람은 권리를 갖고, 일본사람은 권리를 돌리어 보낼 시기가 올 줄 알았다”

 

1920년 10월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된 후에는 수원읍에서 곡물상을 운영하며 사회활동가로, 수원지역의 대표적인 명망가로 여러 사회운동에 관여하였습니다. 우선 출옥 직후 그는 ‘조선기독교창문사’(朝鮮基督敎彰文社) 설립에 참여하여 기금 모금 활동에 적극 나섰습니다. 창문사는 당시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지식인들이 모여 한국인들의 주체적 기독교문화를 창출하기 위해 설립한 문서운동기관입니다.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김세환은 1927년에 다시 활동의 전면에 나섰습니다. 민족운동 진영의 역량강화를 위해 신간회가 조직되고 각 지역에 그 지회 설립이 확산되자 그가 신간회 수원지회에서 지회장, 검사위원 등으로 역할하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었습니다. 1929년에는 수원체육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 후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가 해방의 기쁨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1945년 9월 16일 생을 마쳤습니다. 1963년 건국 무공훈장이 추서되었고 1968년 국립묘지 충렬대에 이장되었습니다.

 

 

결론

김세환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성장하였고, 신앙을 기반으로 활동한 역사적 인물입니다. 그는 두 분야에서 헌신하였습니다. 삼일여학교를 통한 교육활동과 3·1운동으로 대표되는 독립운동 참여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그에게 있어 다른 영역의 활동이 아니었습니다. 둘 다 민족을 위한 활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둘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의 기독교 신앙이었습니다.

김세환은 과거의 인물로 현재 우리에게는 잊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오늘을 가능하게 한 사람이기에 그를 현재의 인물로 되살려야 합니다. 그 과제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가 교회와 지역사회를 통해 성장하고 사회와 나라를 위해 헌신한 것처럼 후학들에게 자신이 받은 것을 전해주고자 모든 것을 다 헌신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삶을 우리가 이어가야 합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우리교회와 우리선교회가 지역사회에서 어떤 활동을 할 수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교회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도울 방법이 무엇인지 논의해 봅시다.

    (독립기념관을 비롯한 민족운동 관련 유적지 답사 등)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4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