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4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2과 여성농촌운동가
황애덕
* 성경봉독 : 마태복음 25:14~30
* 참고성경 : 고린도전서 4:1~5
* 요절 :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
서론
2월의 인물은 여성농촌운동가인 황애덕(黃愛德)입니다. 세례명이 ‘에스더’라 황애시덕(黃愛施德) 혹은 황에스더로도 부릅니다. 황애덕은 일찍부터 신앙적으로 양육 받아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로서는 드물게 일본과 미국에 유학하여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학식을 쌓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그렇지만 황애덕은 자신이 받은 재능과 혜택을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교회를 위해, 사회와 나라를 위해 사용한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녀는 여성교육과 농촌운동, 여성단체 등을 통해 민족운동과 여성운동에 매진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사회가 안고 있던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당면과제를 여성 지식인으로서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본론
황애덕은 1892년에 평남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개화된 아버지와 신앙이 독실한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으며, 노블 부인이 설립한 평양 정진소학교와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하였습니다. 학교에서는 진실하고 열심이 있었으며, 창의성과 지도력이 뛰어나 급우들의 신임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황애덕은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평양으로 가서 숭의여학교 수학 교사로 재직하였습니다. 1913년에는 숭의여학교에서 애국심이 투철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한국 최초의 여성 항일 비밀결사대인 ‘송죽회’(松竹會)를 조직하였습니다. 송죽회는 한글교육과 국사교육 등의 정신교육을 행하였을 뿐 아니라 군자금과 물자를 마련하여 중국과 만주의 항일독립단체에 보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황애덕은 1918년 홀 부인의 권유로 일본에 건너가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동경 여자유학생회’를 조직하여 유학중인 조선인 여자 유학생의 친목과 더불어 기독교 종교 활동, 배일사상 고취와 애국심 고양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1919년 2월 8일에는 동경기독교 청년회관에서 거행된 2·8독립선언에 참여하여 주동학생으로 검거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김마리아 송복신 등 여자 유학생들과 귀국하였으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3월 19일 추적해 온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8월 5일 석방되었습니다. 석방 후에는 김마리아와 ‘대한애국부인회’를 새롭게 정비하고 전국에 지부를 확장하여 독립 군자금을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국내의 모임뿐 아니라 상해와 하와이 등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여성 애국단체들을 통합하는 일에 중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경에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결국 3년의 판결을 받고 감옥에 수감되고 말았습니다. 감옥에서도 그녀는 신앙의 힘으로 견디며 뜻을 굽히지 않았고 수감된 여성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성경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1922년에 가출옥된 황애덕은 이화학당 대학부에 편입하였고, 졸업 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사로 활동하였습니다. 그 후 조선YWCA연합회 헌장제정위원 겸 연합위원,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1925년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1928년 컬럼비아대학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졸업 후 펜실베니아주립대학에서 농촌 사업을 연구하면서 농촌사업을 준비하다가 1929년 1월 귀국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이 농촌으로 가기를 꺼려하니 그들을 꼭 계몽시켜 주시오.” 하면서 교수로 초빙하는 협성여자신학교 채핀 교장의 부탁을 받아들여 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였습니다. 감옥생활을 할 때부터 농촌을 살리는 길이 민족을 살리는 길이라며 농촌운동을 구상했던 그녀는 협성여자신학교 안에 ‘농촌사업지도교육과’를 신설하고 학생들에게 농촌실정과 농촌사업의 필요성을 계몽하면서 “우리가 그들을 위해 농촌으로 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여름방학 때에는 YWCA와 협력하여 학생들을 황해도 수안으로 파견해 실습하게 하였습니다. 그녀는 이 사업의 성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황해도 수안에서 3년 동안 전개한 농촌계몽사업 결과 사면 30리 모든 남녀노소가 모두 한글을 터득했고 기독교인이 되어 술 담배 투전 노름을 하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어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분위기도 쾌활해지게 되었다.”
그녀는 농촌운동을 이끄는 여성 기독교계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당시 그의 가르침을 받고 농촌운동에 헌신한 학생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이며 경기도 화성의 샘골에 정착하여 활동한 최용신도 그들 중 한 명입니다.
이렇게 시작한 농촌계몽운동은 이후 여섯 개의 학교와 두 개의 교회를 세웠고, 이르는 곳마다 강습소와 예배처소를 설립하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농촌계몽운동이 만주지역에까지 확장되자 그녀는 1935년 만주로 건너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활동하였습니다. 그녀는 먼저 하얼빈에서 한인 농민들이 굶주리고 빚에 시달리는 상황을 목격한 후 만주에서 가장 궁벽한 ‘경성현’이란 곳에 한인 농장을 건설하여 동포 농민들의 생활을 향상시켰고, 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일에도 힘을 다하였습니다. 이후 귀국하여 서울 근교의 광주 백현리에 농장을 마련하고 농촌생활을 하며 일체의 공적 생활에 관여하지 않고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 황애덕은 자신의 농토를 전부 소작인에게 분배해 주고 서울로 올라와 나라 재건운동을 시작했습니다. YWCA연합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기독교 여성운동가들과 독립촉성애국부인회를 결성하였고, 당시의 여성단체를 총망라한 ‘여성단체총연맹’을 조직하여 초대회장이 되었습니다. 그 후 다시 미국에 유학하였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한인 교민사회에서 구호물품을 모집하여 조국으로 보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전쟁 후 귀국하여 전쟁 미망인과 고아들을 위한 한미 기술학교를 경영하였고, 기독교 여자절제회도 재건하여 총무로 활동하면서 갱생의 길을 열었습니다. 또 1947년에는 서울 남산 기슭에 조경우 목사와 일신교회를 설립·건축하였고, 장로로 피택되어 교회를 발전시키는 데에도 앞장섰습니다. 1967년에는 2·8 독립선언과 3·1운동 등에 참여한 여성 독립운동가를 규합하여 3·1여성동지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71년 경기도 부평에서 별세하였으며, ‘건국포장’(1977년)과 ‘건국훈장 애국장’(1990년)을 받았습니다.
결론
황애덕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활동한 여성 엘리트입니다. 황애덕은 교회의 도움으로 성장하여 일본과 미국에 유학할 수 있었습니다. 귀국해서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교회와 사회를 위해 사용하였기에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지식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황애덕은 활동 초기에는 송죽회 조직이나 2·8독립선언, 3·1운동 등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감옥생활 후 농촌을 살리는 활동에 뛰어들었습니다. 황애덕은 교회를 기반으로 민족운동과 여성운동을 전개하여 당시 교회가 시대적이며 민족적인 과제에 적극 참여하는 기반을 마련하였기에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던져 줍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황애덕이 시대적 사회적 당면 과제를 위해 헌신할 수 있었던 근원은 무엇입니까?
2. 우리가 받은 혜택과 재능을 어떻게 교회와 사회를 위해 사용할 수 있을지 이야기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4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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