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감리교자료 웨슬레의 구원관 2
웨슬레의 구원관
웨슬레의 구원론의 구조
4. 新生(거듭남)
가. 의인과의 관계
웨슬레의 구원론에 따르면 의인의 사건에 동반되어 일어나는 사건으로 “거듭남”이라고도 말하는 “신생”의 사건이 설명된다. 이 신생의 사건은 의인과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굳이 순서를 논한다면 논리적인 순서가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성령께서 인간의 영혼 속에 역사하신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둘이 동일한 사건이라고는 하지만 서로 상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의인이 상대적인 변화를 뜻한다면 신생은 진정한 실제적인 변화를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의롭다고 여기심으로서 인간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시지만 인간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심으로서 인간 안에서 일하신다. 따라서 의인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외적인 관계성을 변화시킴으로서 원수의 관계였던 것을 자녀의 관계로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신생은 인간의 내적 영혼을 변화시킴으로서 죄인을 성자가 되게 한다. 그리고 의인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위치로 회복시키는 것이라면 신생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의인은 죄책을 제거하는 것이라면 신생은 죄의 세력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성격에 있어서는 상이한 것이다.
나. 신생의 본질
사람을 영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신생은 자연적인 출생과 흡사한 것으로 설명된다. 모태에 있는 생명의 경우 사람의 모양은 하고 있지만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감각은 불완전하게 발달되어 있으며, 이 세상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처럼 신생하기 이전의 사람도 영적인 의미에서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고, 그래서 은총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신생하는 순간에 그 사람에게는 전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으며 죄를 짓지 않게 되며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소망함으로 선한 양심의 증거를 가질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도록 강권함을 받게 된다. 따라서 웨슬레는 신생을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끄실 때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 안에서 역사하시는 위대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웨슬레에 의하면 이 신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으로 모든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였다. 참된 성결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새로워지고 자기의 육신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교만이 겸손으로, 거친 마음이 온유한 마음으로, 미움·시기·惡意가 모든 인류에 대한 진실과 희생적인 사랑으로 변화된다. 그러므로 신생은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악마적인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으로 바꿔지는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 신생의 내용
그렇다면 신생은 어떻게 가능한가? 신생은 신생하는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큰 변화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영혼을 살리실 때, 혹은 인간의 영혼을 죄로 인한 죽음의 상태에서 義의 생명의 삶으로 일으키실 때에 인간의 속에서 역사하여 외양으로 나타나는 삶의 변화된 모습이다 이것은 세상적, 감각적, 악마적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으로 전환되는 변화이다. 신생을 경험함으로서 사람들은 이해의 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빛, 곧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또한 귀도 열려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신생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하나님의 은총은 이와 같은 거듭난 자의 마음속에 주어지고, 이들의 찬양과 기도는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거듭난 자의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 가운데에 있고, 또한 하나님의 생명이 그의 속에서 함께 한다. 성령의 주요 과제는 인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용납하도록 도와주고,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啓示하는 역할을 하는 것인데, 바로 이러한 성령의 특유한 역사는 신생과 동시에 시작된다. 성령이 부여하는 바로 이와 같은 경험적인 확신에 의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생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웨슬레는 이 질문에 대해서 신생의 표적으로서 “믿음” “소망” “사랑” 등의 세 가지의 표적을 말하였다 여기에서의 “믿음”은 사변적인 믿음이나 죽은 믿음이 아니다. 이 믿음은 모든 믿는 교리들뿐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신이다. 이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본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열매는 “힘”(能力)과 “平安”이다. 그리고 이때의 힘은 죄를 이기는 힘이고, 따라서 범죄치 않게 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평안은 하나님의 자비와 의가 나타나심으로 인하여 비롯된 평안이다. 또 신생의 표적으로서의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그 속에 내주하심으로 인하여 생겨난 결과이다. 곧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확신이다. 이 확신은 믿음의 확신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이며, 장래에 대한 영광의 소망이다. 그리고 마지막의 사랑의 표적은 사람들의 삶에 새로운 동기를 주는 것으로써,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먼저 사랑해 주심으로 생겨난 “사랑”이다. 이 사랑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며 이러한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억지로서가 아니라 기쁨으로 따르고자 노력하게 된다.
라. 신생한 자의 증거
그렇다면 신생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 신생한 사람에게도 죄가 있는가? 아니면 이들에게는 죄가 전혀 없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 웨슬레는 바울의 주장을 따라서 육체의 정욕에 의한 악한 성질이 신생한 자에게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한다. 그리고 이 악한 정욕과 성령이 서로 대적하는 세력으로 신생한 자의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으로써 웨슬레의 생각은 신자에게는 죄가 없고, 육체에 속한 정욕도 없고, 타락의 경향성도 없다는 생각과는 반대되는 생각이다. 웨슬레의 주장은 신생한 사람들도 타락할 수 있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짝하고자 하는 경향이 항상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신생한 자도 그 마음속에 남아있는 죄, 곧 자만·고집·불신 등을 항상 느끼며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레는 사람이 칭의와 신생함을 받은 후에도 회개가 계속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계속하여 깨어 있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때때로 자만·고집·분노를 나타내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기도 하고 안락을 더 사랑하고 세상의 명예와 향락을 좇게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웨슬레는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해서 말하는데, 웨슬레가 이 때 말하는 회개는 신생한 자의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고집과 우상숭배의 경향성, 곧 불신앙으로 기울어지는 마음의 경향성을 깨닫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렇다면 불신자와 신생한 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웨슬리는 신생하지 못한 사람은 죄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다. 이에 비하여 신생한 자는 죄에 순종하여 살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신생한 사람은 범죄의 가능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죄에 대적하여 싸우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신생한 자도 죄의 세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에 있지는 않다. 그래서 죄의 세력과 맞서서 있는데, 그 맞선 상태는 대항해서 싸우는 상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생한 자의 삶 속에는 그리스도가 來住해 계신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가 계심으로 죄와 싸우면서 성화의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생한 자도 불신자처럼 육체 안에서 살지만 육체를 좇아 살지 않고 성령을 좇아 산다. 그러나 이들도 죄의 경향성이 그대로 남아 있는 연고로 계속해서 회개를 필요로 한다. 물론 이 때의 회개는 구원과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필요한 거듭난 자의 회개이다.
5. 聖化
가. 성화의 의미
웨슬레에게 있어서 “성화”라는 개념은 두 가지의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파악하는 것인데, 이는 죄의 세력에서 자유케 되며 죄의 성질로부터 씻김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적극적인 측면에서 파악한 것으로써,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어지는 것이고, 이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이다. 칭의가 죄책에서 구원함을 받는 것이라면 성화는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함을 받는 것이다. 이 성화는 칭의의 열매이기는 하지만 칭의와는 전적으로 다른 성질의 또 하나의 하나님의 선물이다. 칭의는 실제에 있어서는 의롭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법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성화는 실제적으로도 의로워지는 것을 뜻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칭의는 이로부터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라면, 성화는 이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나. 성화론의 특징
웨슬레의 이 성화론은 몇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지적할 수 있는 특징은 점진적인 성장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칭의를 포함하는 초기의 성화의 단계로부터 완전한 성화의 단계로 점차 성장해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거듭난 이후에도 그 사람의 신앙은 계속하여 성장한다는 것이다. 웨슬레가 이처럼 점진적인 발전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 성화의 시작은 신생이었다. 신생의 순간적인 경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내적인 새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부은바 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초기의 성화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성령의 도우심으로 육의 악한 성질, 악한 생각과 싸우면서 성화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 성화의 발전과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서 죽으면 죽을수록 하나님을 향하여는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둘째 특징은 성화의 이 점진적인 과정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로 인하여 어느 순간에 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끌려 올려지는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웨슬레가 이처럼 성화의 과정에서의 순간적인 발전의 단계가 있다고 보았던 것은 ‘성화’는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그 자신의 이해가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것은 특별히 그 자신의 올더스케이드街에서의 하나님 경험으로부터 얻어낸 결론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 성화의 내용
웨슬레에게 의하면 이러한 ‘성화’는 사람이 거듭날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사람이 회개와 믿음으로 신생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이 신생의 순간부터 성화는 시작된다는 것이다. 웨슬레는 이 시기의 성화를 ‘초기의 성화’‘라고 하였다. 이 시기의 성화는 거듭남으로 인하여 성화의 단계에는 들어섰으나 아직은 온전한 성화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의 성화이다. 이 시기의 성화를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겸손하나 온전히 겸손하지 못하며 그의 겸손은 자만과 섞여져 있다.
그는 온유하나 때때로 분노가 그의 온유를 부숴 버린다.
결국 그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융해되지 못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성화가 점차 성장하는 과정을 갖는데, 그 성장의 과정에서 어느 순간에 온전한 성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온전한 성화는 그리스도인 자신이 다시 한 번 자신의 무능과 자기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를 깨닫고 믿음으로 받게 되는 신앙체험이다. 이 온전한 성화의 본질은 ‘온전한 사랑’ 혹은 ‘순수한 사랑’이다. 웨슬레에게 의하면 이 순간적인 체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씻김을 받으며 사랑과 봉사에 더욱 큰 힘을 얻어 승리하는 생활의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리스도인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될 수 없는 단계이다. 이와 같은 성결의 은혜를 받은 사람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승리의 그 날까지 계속 전진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계속적인 승리의 생활을 위해서 요청되는 것이 온전한 성결의 체험인 것이다. 그래서 웨슬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완전한 성화”, 또는 “기독자의 완전”으로 나아갈 것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6. 그리스도인의 완전
가. 완전의 성격
앞에서 말한 것처럼 웨슬레에게 있어서 ‘성화’는 점진적인 발전의 단계를 갖게 된다. 그래서 웨슬레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로서의 ‘성화’를 말하게 될 때에는 그것이 종말론적인 지향성을 갖고 계속적으로 상승하는 성격을 지니는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초기 성화의 단계인 ‘신생’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인 발전의 과정을 거쳐서 순간적인 ‘완전’의 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완전은 불완전한 완전이었다. 따라서 완전한 완전의 단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데, 이 단계는 ‘영화’의 단계로서 마지막 심판 이후에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신령한 몸”으로 사는 삶의 단계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웨슬레의 구원론은 마지막의 심판의 때를 향하여 계속적으로 발전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특징을 나타낸 것이다.
웨슬레가 이와 같이 구원론을 발전적으로 전개하는 데에 있어서 문제는 없지 않았다. 그 문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해서 말하면서도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하면 인간으로서는 완전할 수 없는 이 불완전한 ‘완전’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였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한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웨슬레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칼빈주의와 같이 인간의 피조적인 한계성을 부인하는 경향성과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비롯되는 영향력을 제외시키려는 경향성을 나타내었던 펠라기우스적인 형태의 해결방법을 경계하였다. 웨슬레는 오히려 인간의 한계성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가능성도 부인하지 않는 해결방법을 찾고자 하였다. 즉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장점과 펠라기우스의 인간의 책임성에 대한 강조를 결합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웨슬레가 말했던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완전이 아닌 불완전한 완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웨슬레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말할 때에 그것은 용서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의 완전, 곧 그리스도로부터 자립할 정도의 완전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것은 도덕적인 완전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웨슬레는 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도덕적 표준에 의해서 판단되는 완전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의 성결”이라고 정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 불완전한 완전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웨슬레가 말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불완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어떤 면에서 완전하지 못한가? 첫째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완전하지 못하다. 그리스도인들은 땅 위에서 사는 동안 무지로부터 해방될 만큼 완전하지 못하며, 그래서 무지와 과오에 대해서 자유하지 못하다. 아무도 전지하기를 기대할 수 없으며 무오하기를 바랄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도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유혹도 결함도 있다. 두 번째 완전치 못한 내용은 실수를 전혀 범하지 않을 만큼 완전한 것이 아닌 것이었다. 이것은 무지로부터 비롯되는 결과로써, 이와 같은 부분적으로만 아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과 부딪칠 때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는 기대를 할 수 없다는 불완전성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무지함도 없고, 실수도 없고, 연약성도 없고, 유혹도 없는 완전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계속적인 성장 혹은 개선의 여지가 없는 완전이 아닌 것이다. 이 완전은 불완전한 완전이기 때문에 아직도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라가야 할 필요가 있는 완전인 것이다. 그래서 매일 매일 하나님의 지식과 사랑 안에서 성장해야 하는 완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완전은 죄가 없어져서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완전이 아니라 죄를 극복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완전은 죄로부터 자유한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도덕적인 객관적 표준에 의해서 측정되는 죄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척도에 의해서 측정되는 죄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래서 이 완전은 절대적인 완전이 아니요 상대적인 완전으로서 신자가 완전한 사랑 안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이 완전은 “의도에서의 순수성”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출처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리교자료 웨슬리의 구원에 대한 소논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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