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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감리회 감리교자료 웨슬레의 구원관 1

나효선 2010. 2. 12. 15:08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리교자료 웨슬레의 구원관 1

 

웨슬레의 구원관

 

웨슬레의 구원론의 구조

 

1. 구원의 순서

 

    웨슬레의 구원론은 몇 단계의 점진적인 발전의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구원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先行하는 은총”으로부터 시작한다. 先行하는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마음에 역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소원이 생기게 하고, 범죄한 사실을 인식하게 한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先行하는 은총은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생명으로 지향하도록 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先行하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무감각해진 인간의 마음이 감각적이 되고, 둔감해 있던 마음이 민감하게 열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또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민감해지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자각을 한 인간에게 구원은 “확신적 은총”에 의해서 수행된다. 확신적 은총은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의 죄의 문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인식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보다 깊은 자각을 일으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과정을 거친 후에 비로소 사람들은 기독교 고유의 구원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구원은 “은총을 통하여”, 또는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웨슬레도 어거스틴과 칼빈의 구원론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웨슬레에게서 이 구원은 두 개의 큰 지체, 곧 의인과 성화로 구성된다. 사람들은 의인, 곧 칭의 받음으로서 죄의 과오로부터 구원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서 살게 된다. 그리고 성화를 통하여서는 죄의 능력과 근원으로부터 구원함을 받고, 창조 때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 이러한 구원은 순간적이면서 또한 점진적인 것이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의인의 그 순간에 이루어진다. 의인은 무엇보다도 죄의 지배의 상태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직은 죄의 세력은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의인 받은 인간은 계속하여 사랑과 온유와 겸손과 거룩한 생활을 계속하여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충만해지기까지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마침내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습을 입을 때까지 이 성화의 과정은 계속되어져야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진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 이루어질 수 있는 ‘완전’으로 설명되어졌다. 그러나 이때의 완전은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완전’에 이어서 ‘영화’의 단계를 말하는데, 이 단계는 마지막 심판 이후에 하나님에 의해서 모든 죄의 세력들이 제거됨으로서 이루어질 수 있는 단계였다. 따라서 웨슬레가 말하는 ‘영화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부활하여 새롭게 되어진 “신령한 몸”으로 사는 삶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러한 웨슬레가 말하는 구원론에는 다음의 몇 가지 단계의 반전의 과정이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것은 “모든 인간은 죄 아래에 있다”는 바울의 이해와 동일한 이해가 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인간은 죄 아래에 있다. 그래서 그 인간 자신으로서는 어떠한 善으로의 가능성은 전혀 없는 상태이다. 이러한 인간에게 이제 하나님의 은총이 작용하는데, 그 은총은 모든 인간들에게 미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 하나님의 은총 아래에서 벗어날 사람은 없다. 이 하나님의 “선행적인 은총”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죄로부터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웨슬레의 구원론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 아래에 있음으로 멸망이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는 것과 같이 구원의 가능성도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총이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므로 구원의 문도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진 것이었다. 그 다음 단계는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여기에 반응하는 사람은 이제 회개, 또는 참회의 과정을 경험하게 되는 단계이다. 이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오직 은총으로만, 신앙을 통해서만 구원을 경험할 수가 있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구원은 의인과 성화로 이루어진다. 의인 혹은 칭의는 신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인데, 이는 죄책으로부터 구원한다. 성화는 바로 이 신생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 신생은 죄의 부패성으로부터 구원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의인과 성화로 구원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다시 완전을 지향하면서 성장해 나간다. 그래서 마침내 순간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 ‘완전의 삶’을 살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완전의 삶은 불완전한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의 삶은 그 자체상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웨슬레가 이와 같은 불완전한 완전을 말할 때에는 이미 완전한 완전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래서 결국에 가서는 완전한 완전, 곧 “영화”의 단계를 말하게 되는데, 이 완전한 ‘완전’은 마지막 심판 이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때에 새로운 ‘신령한 몸’으로 다시 남으로 인하여 이룩될 수 있는 삶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웨슬레의 구원관의 요약이다. 이러한 웨슬레의 구원관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웨슬레가 이와 같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도식을 어떠한 방법으로 설명해나가는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설명은 고대 이래로 계속되어온 죄와 은총의 교리에 대한 심각한 논쟁의 핵심적인 문제가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 문제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능력을 동시에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2. 참회

 

    웨슬레의 구원론은 모든 인간이 처해 있는 죄인으로서의 상태에 관한 그 자신의 이해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가 이해하고 있는 바의 인간의 상태는 세 가지로 설명이 되는데, 첫째는 자연적인 인간의 상태이고, 둘째는 율법 아래에 있는 인간의 상태이고, 셋째는 은총 아래에 있는 인간의 상태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특별히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에 대한 진술은 인상적이다. 웨슬레는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은 자신의 속에 하나님의 은총이 역사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의 인간이라고 진술하였다. 웨슬레에게 의하면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을 그대로 방치해 두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양심 속에서 선행적인 은총으로 역사하여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을 율법의 심판 아래로 이끌어 들임으로서 타락의 조건을 인식하게 한다. 하나님은 그럼으로써 죄인인 인간을 참회로 이끄시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웨슬레는 자신만의 독특한 특징을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참회 또는 죄의 확신을 신앙보다 앞서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 있어서 웨슬레의 구원론은 초기의 종교 개혁자들의 이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초기 종교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참회는 신앙 이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 이후에 신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참회는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열매로서의 성격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레의 구원론에서 중요한 것은 항상 성령의 역사였다. 그런가 하면 웨슬레에게 있어서 참회는 또 한편으로 인간의 측면에서도 적극적인 행동이었다. 참회야말로 죄인인 인간이 죄를 자각하는 것이었고, 그로부터 하나님 앞에서 적극적으로 죄의 용서를 구하는 행위였다. 그래서 웨슬레에게서 나타나는 참회의 또 다른 특징은 ‘간구’라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웨슬레에게 있어서 참회는 구원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의 단계였고, 칭의의 과정으로 접어드는 시작이었다.

 

3. 의인

 

        가. 의인의 조건

    웨슬레에 의하면 義認, 곧 칭의를 받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오직 ‘믿음’ 밖에는 없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웨슬레에 의하면, 하나님의 先行하시는 은총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죄를 인식하고 뉘우쳐 참회하게 되는데, 참회의 열매는 ‘믿음’을 간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따라서 이제 참회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믿음’인 것이고 이를 근거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그 사람을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에 따라서 의인의 조건은 오로지 믿음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믿음”은 칭의 받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 되는 동시에 반드시 회개, 곧 참회의 과정이 수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웨슬레는 이때의 참회를 인간 자신의 극복할 수 없는 죄성, 무력감을 깨달아 아는 것으로 이해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참회의 신앙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역사하심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죄책감 및 도움의 필요성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질 경우 참회에 합당한 업적이 의인의 신앙에 앞서서 일어난다. 물론 마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처럼 기회가 없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참회에 따르는 업적의 기회가 주어진다. 이로 인하여 참회의 신앙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 합당한 열매로서의 업적을 이루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와 같은 참회의 업적이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업적은 참회의 신앙의 열매로서 의인을 위하여 간접적으로 필요한 요소일 뿐이다. 즉 하나님이 인간 안에서 계속적인 역사의 조건으로 참회의 신앙에 따르는 자유로운 응답을 요구하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응답의 수준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어서 그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이 인간의 측면에서의 참회의 신앙에 따른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으로서의 열매가 갖는 성격은 다만 하나님의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을 받을만한 준비가 되었다는 표시로서의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앙의 업적은 참회의 신앙의 열매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 된다. 도덕적 의미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의인의 신앙을 용납하도록 허용한다는 인간의 입장에서의 표시에 불과한 것만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칭의에 있어서 유일한 조건이 되는 믿음은 어떤 것인가?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에 대한 동의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전적으로 자신을 의뢰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공로를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죄인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럼으로써 생명이 되신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존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관념적이거나 사변적인 믿음이 아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역사하시어서 내적 변화를 일으키고 그럼으로써 하나님께 확고히 의뢰하는 믿음이다.

 

        나. 의인의 내용

    그렇다면 “의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속죄, 곧 죄의 용서이다. 사망선고를 받은 죄인을 생명으로 옮겨놓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죄책에서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의 자리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義認의 사건은 죄에서 용서함을 받고 죄에서 해방되는 사건이다. 그렇다고 의인 받은 사람의 실제 생활이 사실에 있어서도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거나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죄가 없어서 하나님이 의롭게 여겨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죄로 인정하시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인간을 유죄로 선고하시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 칭의는 곧 죄의 사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의 先行하시는 은총에 근거해서 善을 행할 수 있고 사실상으로 行한다고 할지라도 그 善行은 결국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있는 것은 될 수 없다. 오히려 의인 받은 사람들은 모두 죄인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죄인들이 어떠한 조건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인가? 그것은 신앙으로부터 기인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인간 안에서 인간 자신을 하나님이 계속적으로 역사하시도록 개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의인의 신앙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 자신과 화해시키셨다는 성스러운 확신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 자신을 사랑하시어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죽으셨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진정한 신뢰와 확신을 뜻한다. 그렇다면 의인의 은혜를 받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회개”하고 “믿는 것” 뿐이다. 여기에서 “회개”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고 그래서 이것은 “자아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웨슬레는 이 회개를 두 가지의 종류 또는 단계로 구분하였다. 첫째 단계는 율법적인 회개의 단계이고, 두 번째 단계는 복음적인 회개의 단계이었다. 여기에서 율법적인 회개는 단지 자신의 죄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복음적인 회개는 자신의 죄에 대한 깨달음의 결과로 자기 자신을 죄의 상태에서 거룩함의 상태로 바꾸어지는 단계라고 설명하였다. 그래서 율법에 대한 회개는 신앙을 수용하는 길잡이가 되는 회개이며, 복음적인 회개는 신자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난 이후에 하나님과 그 자신과의 계속적인 관계의 유지를 위해서 필요한 회개였다. 웨슬레는 사람이 믿기 전에 바로 이와 같은 회개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즉 웨슬레는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의존하였던 것과 자기 자신의 의로움에 대해서 신뢰하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웨슬레가 “복음을 믿는다”라고 말했을 때에, 그 복음의 주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것,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시고 죄인인 인간들을 대신해서 죽게 하셨다는 것,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고난당하신 것이고 이로 인하여 모든 사람의 살 길이 마련되었다고 하는 것 등을 의미하였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義認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생활의 기초이고 시작이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간 자신에게 어떤 변화로서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곧 “너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멘”이라고 자신의 모든 것으로 화답함으로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할 때에서야 비로소 각 개인의 삶 속에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사람의 삶의 개방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의인 받은 이후로 주어지는 삶은 전혀 새로운 삶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전혀 새로운 삶으로부터 이제 성화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출처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리교자료 웨슬리의 구원에 대한 소논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