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웨슬리 속회 공과 13

나효선 2009. 9. 2. 15:47

기독교대한감리회 웨슬리 속회 공과 13

웨슬리 속회 공과

                                                                                                                     김원경 목사 편

제 13 과

성령의 증거 (2)

 

성경 : 로마서 8:16절

(요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그러면 다음으로 우리가 이(하나님의 영과 우리 영의 함께 하는) 증거를 어떻게 사람의 마음의 추측과 마귀의 현혹으로부터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고찰해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자기 영혼을 스스로 속이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이를 상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가장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잘못 되면 그 사람은 대체로 가장 치명적인 결말을 가져오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이런 과오를 범한 사람이 자기의 실수를 발견하였을 때에는 이미 늦어서 이를 해결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면 먼저 이 증거를 생래적인 인간이 그의 마음에 갖는 추측으로부터 어떻게 구별할 것입니까?

    결코 죄를 깨닫지 못해 본 사람은 늘 은근히 자기를 높여 자기를 특별한 영적인 일에서 마땅히 생각해야 할 그 이상으로 생각들을 합니다. 여기에서 육신의 생각으로 쓸데없이 교만해진 이가 자기들 가운데 있는 참 그리스도인의 이 특권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기도 틀림없이 그들 편에 끼울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나아가서는 자기도 이런 것을 가졌노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런 예가 지금도 세상에 많습니다. 각 시대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우리 영과 더불어 증거하시는 이 참 증거를 해를 가져오는 억측에서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대답합니다. 성경에 이들을 분간케 하는 표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아주 평이하게 이 하나님의 영이 신자의 영과 더불어 증거하는 참되고 순수한 증거에 앞서는 또는 그 증거에 동반하는 또한 그 증거 후에 오는 여러 가지 명백한 표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조심스럽게 비교하며 이런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는 자는 누구든지 이 분명한 것을 모를 사람이 없습니다. 영의 참 증거와 가짜 증거와의 사이에는 이런 모든 면에서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양자를 혼돈할 위험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은사를 공연히 헛되이 하고 있는 사람은 그가 참으로 이것을 원하기만 한다면 분명히 자기가 지금까지 하나의 심한 망상에 빠져 있었고 하나의 거짓을 믿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1) 가령, 예를 들면 성경은 회개 곧 죄를 깨닫는 것은 늘 이 사죄의 증거에 일관되게 앞서오는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행 2:38)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행 3:19) 하였습니다. 우리의 교회도 또한 이와 일치하여 늘 회개를 사죄나 사죄의 증거 앞에 놓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거짓 없이 그 거룩한 복음을 믿는 이를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사면하여 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마음으로부터의 회개와 참 믿음을 가지고 자기에게 돌아오는 모든 자에게 사죄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회개에 대하여는 인연이 없는 자이며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을 모르는 자이며 죄의 기억으로 인해 근심해 보지 못하고 그로써 견딜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느껴 보지 못한 자인 것입니다.

 

2) 다시,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에 대해 묘사하기를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에 앞서는 것으로써 크고 강한 변화로써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흑암에서 광명으로의 변화요,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에로 옮겨지는 것이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곧 죽은 자 가운데로부터의 부활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말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그리고 또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느니라”(엡 2:5-6)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사람의 이와 같은 변화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그가 이 문제는 전적으로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입니다. 그는 당신에게 그는 늘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언제 그런 변화가 필요한 때가 있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그는 아마도 아직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고 자연의 소리를 하나님의 소리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3) 그러나 우리는 과거에 체험하고 또는 체험 못한 것들에 대한 고찰을 미루고, 현재의 표적들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주제넘게 스스로 속이는 자들을 손쉽게 구별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의 증거에 동반하는(주 안에서의) 기쁨을 겸손한 희락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기쁨은 용서함 받은 죄인으로 하여금 “오 나는 미천합니다. 내가 무엇이고 내 아버지 집은 무엇입니까? 내가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하고 부르짖게 만드는 기쁨입니다. 겸손이 있는 곳에 온유, 인내, 양선,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거기에 부드러우면서 순복하는 정신이 있고, 유화(宥和)와 달콤함이 있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혼의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열매들이 주제넘은 사람들의 추측으로 생긴 영의 증거에 따를 것입니까? 정반대올시다. 그런 사람은 그들이 하나님의 호의를 받고 있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더욱 교만해집니다. 자기를 높일수록 그들은 더욱 건방지게 됩니다. 자기가 보다 강한 증거를 가졌다고 상상하면 할수록, 그는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을 깔봅니다. 그리하여 어떤 책망도 받을 수 없게 되고 어떤 거슬리는 일이라도 더욱 참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하여 보다 온유하고 친절하며 가르칠 만하기보다는 듣기는 더디 하고 말하기는 빨리 하며 누구에게도 배우려 하지 않고 그 성격이 사나와지고 과격하여져서 대화에도 지나치게 열렬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때로는 그 사람은 마치 하나님의 손에서 일을 빼앗아 자기가 하면서 원수를 삼키려는 것처럼 그의 모양에서나 말과 모든 품행에서 사나움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4) 다시 한 번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이것으로부터 오는 분명한 표적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요일 5:3)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이다”(요 14:21) 하셨습니다. 사랑은 즐겨 순종하고자 합니다. 사랑은 무엇이든지 사랑하는 자에게 수락될 만한 것은 즐겨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는 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 위에서 그 뜻 행하기를 신속히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하는 주제넘은 사람들의 특징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계명을 불순종하고 범하고 지키지 않는 자유를 주고 있는 셈입니다. 아마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두려울 때는 그의 뜻을 행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 자신들이 율법아래 있지 않다고 보는 까닭에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는데도 전보다 열심히 없으며 악을 피하는 데도 덜 조심하고 자기의 마음을 지키며 자기 입술을 지키는 데도 소홀히 하고 열심을 덜 냅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는 데도 전보다 진실하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려 그는 자기가 자유함을 받았다고 상상하는 까닭에 그 생활의 전모가 변질된 것입니다. 그는 벌써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지 않으며 혈과 육과 싸우는 것 뿐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싸우는 일도, 어려운 일을 참는 일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쓰는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천당으로 가는 아주 쉬운 길, 넓고 평탄하고 꽃 핀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선 자기 영혼을 향하여 “영혼아,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기 영의 참다운 증거를 갖지 못하였다는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갖지 못한 그 표적들을 가졌다고 증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는 불쌍한 자여, 당신 자신을 발견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부하고 있는 자여,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안에 증거가 있으니 모든 원수를 능히 대적할 수 있다고 하는 자여! 그대 자신을 발견하시오. 당신은 저울에 달아서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미 그대의 영혼을 시험하여 그대는 버림받은 은이라고 증명하였습니다. 당신은 마음이 겸손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은 자비롭지 못하고 온유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기쁨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은 주 안에 있는 기쁨이 아닌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성령을 받은 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당신의 영과 더불어 그대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듯이 이것은 분명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오!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당신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도록 그리하여 당신 자신을 알려진 그대로 알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대 자신 안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마침내는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음성, “안심하라 그대의 죄를 사하였느니라. 그대의 믿음이 너를 성케 하였느니라”(마 9:2, 22)고 하시는 말씀을 듣도록 하십시오.

 

[연습문제]

 

1.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하는 증거를 사람의 마음의 추측과 마귀의 현혹으로부터 어떻게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1)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에 분명 앞서는 것으로써, □□와 □□ 곧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마 3: 2)

2) 성령의 증거에 동반하는 것으로써 주 안에서의 □□ 곧 겸손한 희락을 보아 알 수 있으며(욥 40:4, 42:5-6) (갈 5:22, 23)

3) 증거 이후에 오는 것으로써, 하나님을 □□하는 것 곧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분별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음(요일 5:3) (요 1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