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에서 소통이 잘 이루어지기도하고 단절이 되거나 착각, 오해에 봉착하기도 한다.
‘고질적 이성주의(理性主義)’가 마음으로 느끼는 감성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 느낌이 올바름을 인정하지 않고, 자꾸만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표적’을 요구한다. “이러면 믿을 수가 있어.” “착각을 했나?” “아닌가봐.” 생소한 경험이라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겠다. ‘자율학습’이 너무 힘이 든다. 변화를 위한 진통일까? 변화할 필요가 있을까? 변화할 가치가 있나?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나?
하나님께 “지혜를 주옵소서.” 기도만 할 뿐이다.
소통(기호 記號)
≪ 인간들은 문자를 포함한 상징(symbol)과 도상(圖像, icon), 지표(index)로써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으며, 서로 의사를 소통한다. 여기서 자기 생각을 표현하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어 내는 행위를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 하고, 의미 작용과 기호를 통해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행위를 커뮤니케이션이라 하며, 이 둘을 합하여 기호 작용(semiosis)이라 한다.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는 기표(記表:signifiant)와 기의(記意:signify) 그리고 기호 자체로 구성된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미꽃을 선물했다면,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기의이고, 꽃집에서 산 장미꽃은 나의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 곧 기표가 된다. 곧 기의가 기표와 결합하여 사랑을 표현하는 기호를 만들어낸 것이다. 장미꽃을 받아 든 사람은 그것을 선물한 사람의 의도를 해석한다. 이때 발생하는 현상을 의미 작용이라고 한다. 기표로써 기의를 표현하는 쪽뿐만 아니라 기표를 대할 때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쪽에서도 의미 작용이 일어난다. 그리고 준 쪽과 받은 쪽의 의미 작용이 동일하게 일어날 경우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송신자가 목표한 의미 작용이 만일 수신자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커뮤니케이션은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실패한 커뮤니케이션에도 의미 작용은 역시 일어난다. 이것은 기호란 단일 의미만을 갖지 않고 다의성을 띨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상징으로 표시되는 기호는 본질적으로 다의적이며, 따라서 다의적인 기호를 매개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언제나 실패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
나는 에둘러 표현한 것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 기호를 잘 해석해야 하는데 송신자에게 숨은 뜻이 있다면 잘 이해하지 못한다. 직접 대화를 해도 사람의 주관이 들어가서,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기 때문에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정보를 얻어 지식은 있으나 생소한 일이라서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힘이 들고, 용기가 많이 필요하다. 어미닭의 도움이 필요하다.
알맞은 때에 ‘탁(啄)’을 해 줄 수 있는 어미닭을 바란다. 아직 때가 아니라면 ‘자율학습’을 더 열심히 하여 강해져서 적절한 때에 ‘줄(啐)’을 잘 하도록 노력한다.
≪ 줄탁동시(啐啄同時)
껍질을 경계로 두 존재의 힘이 하나로 모아졌을 때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이 비유는 결국 이 세상은 혼자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타인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3편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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