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고난을 왜 주시는가?

나효선 2008. 3. 21. 00:14

고난을 왜 주시는가?

  욥기는 성경 통독을 할 때 몇 번 읽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읽고 싶지 않은 성경말씀이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고난’을 당하는 내용이라 굳이 읽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김흥규목사님(인천내리감리교회)의 설교를 듣고 더 자세하게 알고 싶어져서 『귀로 듣다가 눈으로 뵈오니』라는 욥기 강해를 읽고 있다.

고난의 유형난의 유형

1. 자기가 잘못해서 당하는 고난

2. 내가 잘못하지 않고 당하는 고난(부조리한 고난)

3. 남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당하는 고난

욥처럼 부조리한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 존재에 대한 회의를 느낄 수가 있다.

욥기는 인과응보를 뒤집기 위해 쓴 지혜서이다.

『귀로 듣다가 눈으로 뵈오니』

                                                                           김흥규 지음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

네가 누구이기에?

욥 38:1~38

  정교한 건축가에 의해 지어진 창조 세계(38:1~21)

  욥기에 있어서 문학적으로 가장 뛰어난 부분은 욥의 발언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저자가 공을 들였기에 문학적으로도 백미(白眉)에 해당된다는 것이지요. 38: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대답하셨다.” 여기서 여호와, 혹은 야훼, 즉 주님의 구체적인 이름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야훼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부르는 칭호입니다.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구체적 하나님 야훼께서 욥에게 계시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말씀의 청자로서 욥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 관하여 제 3자 다루듯이 하지 않으시고 욥에게 직접 말씀을 건네신다는 것이지요. 또한 폭풍, 곧 회리 바람은 하나님 현현 시에 흔히 발생하는 자연적 신비로서 성경에 묘사되고 있기 때문에(출 19:16~19; 겔 1:4; 슥 9:14) 하나님의 응답이 단지 발언으로 된 것만이 아니고 구체적인 임재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야훼 하나님께서 욥에게 주시는 말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2~3절을 보세요.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욥을 향하여 포문을 여신 첫 질문입니다. 과연 너라는 녀석이 누구이기에 잘 알지도 못하고 허탄한 말로 하나님께서 세계를 이끌어 가시는 섭리와 계획에 대해서 의심하느냐는 일갈이지요! 욥이 계속 자기의 옳음만 주장하면서 하나님께 따지고 드니까 하나님께서 질책부터 먼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지혜와 능력을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지금 자기가 주장하는 것만 다 옳고 하나님은 틀리단 말이냐 하면서 욥에게 핀잔을 주시는 것이지요. '허리를 동인다'는 말은 싸울 채비를 한다는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이제 어디 네가 과연 얼마나 지혜가 뛰어나고 잘나서 너만 옳고 나는 그르다.”고 하는지 한번 하나님과 맞장을 떠보자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하나님은 욥에게 우주 만물이 시작된 태고의 시간과 장소로 화제를 시작하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느냐?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느냐?”(4~6절) 여기 보면 우주의 기초에 관하여 계속 “거기 있었느냐?”, “네가 아느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주를 완벽하게 설계하고 측정하고 공정하실 때 욥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며, 그 놀라운 신비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욥이나 친구들이 안다는 것이 착한 사람에게는 상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주기 위하여, 즉 인과응보의 법칙이 실현되는 장소로 이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사실뿐입니다. 이같이 짧은 지식에 묶여서 우주 창조의 엄청난 계획을 알지 못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지요. 중략

  하나님의 은총과 자유로 지어진 창조 세계(38:22~38)

  4~21절에서 우주의 네 영역, 즉 땅(4~7절)과 바다(8~11절)와 하늘(12~15절)과 지하, 즉 바다 속(16~18절)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제 22~38절에서는 이 영역에 내주하는 피조물의 현상을 다룹니다. 다시 말해 우주의 설계와 건축이라는 주제로부터 우주의 운행과 질서라는 주제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눈, 우박, 바람, 비, 이슬, 얼음, 서리와 같은 다양한 기상 현상들을 언급하신 후(22~30절), 별자리의 신비와 기후의 조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31~38절). 계속해서 우주의 기원과 출처에 대한 욥의 부재와 무지, 무능을 폭로합니다.

  욥은 눈을 쌓아 둔 창고나 우박 창고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22절). 해가 뜨는 곳에 가 본 적도 없으며 동풍이 불어오는 시발점에 가 본 적도 없습니다(24절). 비가 개울을 만들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 신비나, 풀이 돋는 이치나 얼음이 얼고 서리가 내리는 원리는 다 욥이 관여한 것이 아닙니다(25~30절). 여기서 하나님의 자유를 암시하는 또 한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이 없는 땅, 인기척이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는 이가 누구냐?”(26절) 무인지경(無人之境), 비가 아무 쓸데없는 곳에도 비를 주시는 하나님, 창조가 엄격한 도덕 질서 속에서가 아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유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지요! 별자리를 배치하고 관리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신데 여기에 대해 욥은 무지하고 무능합니다(31~33절). 기후와 관련해서 번개와 폭우 현상, 그리고 강물의 범람도 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지 욥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34~38절). 이렇게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의 인식을 훨씬 뛰어넘는 창조 세계의 비밀과 신비를 욥에게 똑똑히 보여줍니다. 욥의 부재와 무지와 무능을 폭로하는 것이지요! 거기에 없었으면서도, 알지도 못하면서, 하지도 못하면서, 한마디로 아무 것도 아닌 주제에 왜 홀로 잘난 척 하느냐는 질책입니다!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욥이 끝까지 자신의 무죄 주장을 굽히지 않는 고집 센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도대체 네가 창조주냐?”를 물으십니다. 우주 만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열거하며 욥의 아무것도 아님을 드러내십니다. 따지고 불평하고 탄식했던 욥이 정신이 번쩍 나도록 매섭게 몰아붙이십니다. 사실 욥이 억울한 피해자인 것은 명백하나 다른 사람은 다 잘못되었고 자기만 옳다고 하는 주장, 심지어 하나님께도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는 태도는 이해는 되지만 결코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自己義), 즉 독선의 모습이 어른거렸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명백히 옳더라도 한 번쯤 자기를 찬찬히 돌아보고 성찰할 줄 아는 지혜와 여유가 필요합니다. 옳은 것만 가지고 세상일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욥기가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정의 그 이상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잘했으니 여기에 상응하는 상을 받고 이만큼 잘못했으니 거기에 비례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상선벌악(賞善罰惡) 즉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 그 이상을 바라보라는 것이지요. 사실 욥이 죄 없이 부당한 고통을 받는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한 그 역시 인과응보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욥 역시 이 우주는 하나님의 상선벌악의 계획이 어김없이 실현되는 장소라는 편협한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지요. “내가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통 받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이 인생의 신비를 깨닫기 원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욥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고하고 신비한 고통을 미리 보여주는 책입니다. 예수님도 아무 잘못 없이 고난을 당하셨지만 불평하거나 원망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무고한 고통이 정의와 엄격한 도덕 질서로만 움직여나가는 이 세상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랑과 용서의 세계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난은 어떠하실까?

  욥의 친구들처럼 제 3자, 객관적 관찰자의 입장으로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입을 하여서 그 상황, 처지를 묵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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