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야성(野性)이 사는 길이다

나효선 2007. 10. 15. 17:32

“야성(野性)이 사는 길이다”

                                                                                                                             나 은 진 목사의 오피니언

                                                                                                                            (라스베가스한인연합감리교회)

   인류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로 처음 지음 받았을 때부터 야성의 인간으로 창조되었다. 옷 하나 걸치지 않고 벌거숭이로 에덴이라는 정글을 누비며 온갖 짐승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인류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야성은 하나님의 영과 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도 지으심을 받은 인류의 몸에 흐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정글을 두려움 없이 마음껏 누비고 돌아다니며 그야말로 정글의 맹수들과도 함께 친구 되어 살 수 있도록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애석하게도 바로 첫 인류인 아담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과 기를 잃어버리고 그의 지혜와 능력을 상실 하고 만다. 정글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잃고 맹수들에 쫓기다가 결국 에덴동산의 숲을 떠나 살게 되었다.

* 믿음에의 회복

   그리고 수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아직도 인류가 하나님의 영성과 지혜를 회복하지 못하고 어둠과 죄악에 빠진 세상에서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하셨다. 약 3년간의 짧으신 공생애기간이 지나면서, 마침내 그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의 형틀에 달리게 하셨으며 그 결과로 피 흘려 죽음을 맞게 하셨다. 그러나 부활하심으로 우리 인류에게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로써 죄 씻음 받게 하시고, 부활의 생명과 함께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이 우리의 육신에 거하도록 하시었다. 하나님께서 처음 부어주신 영을 회복한 것이다. 나아가 예수를 구원의 주로 믿는 자는 구원받아 영생함을 받게 하셨다. 그러므로 야성을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데 있다 하겠다.

* 도시의 정글화

   우리의 삶터가 무섭게 확장되면서 도시가 정글화 되었다. 즉 야성이 더욱 필요하게 된 것이다. 맹수보다 더 무서운 악한 영들이 시시 탐탐 우리의 생명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저들이 우리에게 다가와 달콤하게 속삭여 주면서 한 때 친구가 되어 주지만 그 달콤한 속삭임은 우리 영혼의 독주가 되어 온 몸에 스며든다. 그리고 독주는 서서히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하면서 무력하게 하고 병들어 쓰러지게 한다. 또한 감당하기 어려운 욕망을 갖게 함으로 세상을 탐하게 한다. 이미 하나님을 떠난 죄로 지혜와 능력을 상실한 인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멸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물론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으로 여기지만 도시의 지붕을 휩쓸고 다니는 뱀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긴다. 이를 완강히 뿌리치지 못한 영혼은 저들의 올가미에 목이 조여 옴에 속수무책으로 생명을 내어 놓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말론적인 시대에 있어 우리의 야성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도시의 정글에서 악한 영의 유혹과 싸우며 살아남으려면 야성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야성을 회복하여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 야성을 잃고 욕망에 사로잡히다.

   이러한 도시에 오늘 이 시간에도 한 아기가 태어난다. 벌거벗은 몸으로 태어나면서 목청 높여 울어 댄다. 그러나 이러한 야성은 아기가 자라나면서 부모와 학교의 교육을 접하는 가운데 사라지고 만다. 울 때마다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만족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장한 아기는 더 이상 울지를 않고 요령을 피우고 머리를 쓴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에도 뱀이 도시의 가로수로 자라고 있는 욕망의 나뭇가지에 매어 달려 있으면서 탐스런 열매로 유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브가 그러했듯이 그 유혹의 열매를 냉큼 따서 먹기를 주저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따 먹는 이가 오직 이브뿐이랴! 오늘날의 아담도 지지 않으려고 먹음직도 하고, 본 듯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런 그 열매에 손을 뻗어 따먹고 마는 것이다. 오늘날의 인류도 역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 말씀을 잊고 사는 것이다. 야성이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본성을 갖고 살기 보다는 욕망이라는 열매와 독주를 먹고 마시며 흥청망청 살려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에 예약 없이 욕망에 실족하며 운명을 달리 한다. 진정 살지만 사는 것이 아닌 인생을 허무하게 살다가 인생을 마감 하고 있다. 더러 사람들이 윤회하여 다시 살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이는 허망한 꿈인 것을 알아야 한다. 거짓된 교리에 속지 말고 믿음으로 깨어 정신 차리며 잃은 야성을 회복하자.

* 야성을 회복하는 삶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다시 야성을 회복하여 산다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 해야 할 것이다. 아기의 야성을 회복하자. 잠시나마 살아 누렸던 갓 태어난 아기의 그 야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울부짖을 때 엄마가 기저귀를 갈아주고, 젖을 물리고, 포근히 품에 안아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찌 어린 아기로 돌아간단 말인가? 다시 어린 아기로 돌아갈 수는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울부짖는 것이다. 자주 울고 보챌수록 좋다. 당신은 하나님의 시선을 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자주 아니 매일 매일 나아가라 그리고 믿음을 달라고 부르짖어라. 지혜를 달라고 울부짖어라. 어두운 이 땅에서 길을 찾음과 진리의 깨달음과 생명의 회복을 찾고 또 구하라. 또한 영육간의 강건함을 얻도록 부르짖는 것이다.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 앞에서는 체면을 따지지 말라.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아기에 불과함을 깨달으라. 그러므로 배가 고픈 대로 울고불고 몸과 마음이 불편하다고 소리 질러야 한다. 혼자 내버려 두지 말라고 외치어라. 하나님의 발목을 당신 곁에 붙들어 매 두는 것이다. 이때 다른 사람들은 당신에게 무관심 하여도 당신의 구원을 계획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항상 귀 기울여 들으실 것이다.

이제 당신의 믿음이 성장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나의 구원의 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녀 됨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피 흘려 돌아 가셨음을 하나님의 은혜로서 깨달아 알게 되면서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성령님께서 내게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겠다. 그러므로 이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때에 울부짖음이 곧 하나님께 향한 기도였음을 또한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를 본받고 그 본받는 삶으로 그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려고 또 다른 기도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기도의 야성을 마침내 회복한 것이겠다.

* 야성으로 승리하는 삶

   젊은이들이여! 야성으로 살자. 모세와 같이 인생을 야성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자. 광야 40년 아니 당신의 인생이 이제는 두렵지 않으리라. 또한 ‘엘리야’ 선지자와 같이 야성의 지도자가 되자.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을 노리고 약탈하려는 악한 영들의 세력을 말씀과 기도로 물리치고,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인한 승리의 삶을 살자. 거짓된 숫자에 눌리지 말고, 작은 조각구름에도 희망을 갖자. 우리를 끊임없는 시험과 유혹으로 쓰러트리려는 악한 영에 의한 피해자가 되어 멸망 받지 말고, 이를 물리치며 승리하는 길은 야성을 회복하여 믿음으로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기도의 야성으로 돌아가 어린 아기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자! 복의 복을 구하고 그러므로 생각과 삶의 지경을 넓혀 나가자. 우리에게 당면한 환란에 있어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구하자. 부르짖음의 야성으로 생명과 은혜를 넉넉히 나누는 승리자로서의 멋진 인생을 만들어 가자. 이에 하나님의 자녀 됨의 존귀한 자로서 인정받고, 힘차고 용기 있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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