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나의 믿음의 고향은 홍제감리교회이다. 아버지가 연세대학교 교목이 되셔서 네 살 때 서울에 와서 1980년까지 다녔다. 그 후에 아버지가 부천으로 이사를 가시고 1984년에는 작은 오빠가 목회를 하게 되어서 다니지 않게 되었다.
홍제교회를 이십여 년 만에 가보니 옛날에는 엄청 큰 교회로 여겼는데 그렇지가 않았다.(전에 살던 집의 골목도 어찌 그리 좁게 느껴지던지) 그러나 홍제교회는 복되고 큰 교회이다. 교회의 외형적인 규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1970년대에 같이 중고등부를 다녔던 때에 알던 사람들 중에서 목사님들을 17명(내가 아는 범위임 : 그 중에 큰 형부와 두 오빠가 있다.)이나 배출했다.
참고 : 홍제교회에서 발간한 『홍제교회 70년사』에 나오는 출신 교역자의 수는 38명(1991년까지)이다.
나는 대학교를 다닐 때까지 무언가를 ‘해야겠다’거나 ‘해야만 한다’는 의식이 없었다. 대학교의 학과를 정할 때 어머니와 작은 언니가 다닌 간호학과에 가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가정학과를 가라고 하시니 고민하지도 않고 가정학과를 택했다. 대학교에 가서도 친구들이 교직과목은 이수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별의식이 없이 수업을 들었다. 4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직업을 갖기 위해서 진로에 대해 생각을 하였다. 고등학교 때 적성검사에서 교사가 적합하다고 했고, 교생실습 점수가 높아서 교사가 될 생각을 하였다. 1979년 1월 9일 대전 호수돈여자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을 만나 면접을 보고 호수돈여자중학교 교사로 채용되었다.
그 해 3월에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교장실에 불러서 “수업을 잘한다.”고 말씀하시고, 중학교 교장선생님은 “나의 젊었을 때를 보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어떤 영어선생님은 복도를 지나가는데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더라고 칭찬을 하셨다. 몇 년 후 새로 부임하신 교장선생님께 교생실습 때 교실 뒤에 담당선생님과 교생 아홉 명이 있는 가운데 첫 수업을 하는데 앞에 앉은 두 명의 학생이 “실력 있다.”고 해서 자신감이 생겼다는 말을 하니까 그 소리가 어떻게 귀에 들릴 수가 있느냐고 “대단하다.” 칭찬해 주셨다.
‘해야겠다’고 계획하지 않았고,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시작한 교사생활이지만 칭찬을 받으니 어찌 그런가 생각하니 이미 사년간 교사생활을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홍제교회에서 대학생일 때 사년간 교회학교 교사로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쳤고, 또 설교도 몇 번 했다.
중고등부 때인 1970년대 초에 이미 조별학습, 분임토의, 찬반 토론 등으로 성경 말씀을 공부했다. 성경 말씀 중에서 주제를 몇 선정하여 조를 나누어서 토의하고 서기를 정해서 전지에 발표할 내용을 정리하여 적고 발표자가 대표로 발표했다. 흥부 편과 놀부 편으로 나누어서 그들의 대변인이 되어서 같이 발표할 내용을 정리하고 상대편과 논쟁을 했다. 역할극(롤플레잉)도 했다. 성경에서 주제를 정해주면 배역을 정해서 즉석에서 연기를 했다. 교육에 대한 이론이 무엇인지 수업모형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가운데 중고등부 교사들을 통하여 이미 체험한 것이다. 생일에 자장면을 시켜 먹는 것이 큰 즐거움이던 그 옛날 해마다 여름에 대천, 만리포, 천리포, 춘장대 등으로 기차를 타고 수련회를 갔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을 접하고, 같이 어우러져서 교제하고, 교육받는 경험을 한 것들이 내면에 녹아들어서 미처 의식하지 못했지만 나의 힘, 지혜와 능력이 된 것이다. 바로 하나님이 내 편이 되셨기 때문에 막내로 자라 ‘해야 한다’는 의식이 없던 철부지가 칭찬을 듣고, 경쟁이 심한 야생의 밀림 속에서 당당하게 제 몫을 다하고 열심히 살아나간 원동력이 된 것이다.
아버지가 1945년 12월 5일 춘천에서 형무소 목사 제도를 창설하시고 시무하실 때 한 달에 쌀 서 말만 갖다 주셨는데 어머니가 강원도청의 보건후생국 간호사업계장으로 일하셨기에 시어머니와 조카와 함께 먹고 살 수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1970년대 초 목사 사모인 효자언니는 교회를 개척하는 형부를 돕기 위해 한국은행에 다니면서 일했고, 결핵에도 걸렸었다. 1975년 미국에 간 후 형부가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했기 때문에 생활비와 자녀들의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마흔이 넘어 다시 대학 공부를 해서 취직했다. 형부가 박사학위를 따서 교수가 되고, 자녀들이 예일 대학교, 노스웨스턴 대학교를 졸업하여 의사, 교사, 사회복지사업가로 일할 수 있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장학금, 학자금 대출도 받았다.)
라스베가스한인연합감리교회의 목사인 은진오빠는 대학교 때는 미술을 전공(공예학과)했는데 미국에 가서 목사가 되었다. 사모인 상화언니는 지금도 직업을 가지고 오빠의 목회를 돕고 있다.
생명문감리교회의 목사인 철진오빠는 대학교 때는 행정학을 전공했는데 결핵에 걸린 몸으로 신학공부를 하여 목사가 되었다. 사모인 초등학교 교사였던 경애언니는 두 자녀 대학 등록금을 대기 위해 명예퇴직을 했다. 퇴직금으로 충당하기 위해서이다.(지하에서 21년 목회하고, 지상에서 예배드리기는 4년이 되었다.)
규모가 크지 않은 교회이지만 하나님께서 맡기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데 전혀 손색이 없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영혼구원, 민족구원을 위한 교회가 되고, 『신실한 사람들·희망을 주는 감리교회』가 될 수 있다.
1966년 12월 24일 성극을 한 후 찍은 사진(천사 중의 한 명임)
십년 후인 1976년 7월 28일 교회학교 교사일 때 내가 맡은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들이(지금은?) 여름성경학교 장기자랑에서 ‘인디안’ 춤을 추고 우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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