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을 회복하자. 강하게 살자.” 1
나는 대전에서 나서 4살 때 서울에 가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의 첫 발을 디딘 곳이 대전이다. 대전으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눈물이 났다. 앞으로는 울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그 후 몇 년은 운 기억이 없다.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곳에 빈손으로 와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느라 강해져야만 했다. 막내로 태어나 공주로 자랐는데 하나에서 열까지 스스로 알아서 생활하다보니 강해지고, 독해졌다.(겉 사람만) 1999년 6월 아버지께서 다치시고, 어머니도 그 후 다치셔서 여름방학 때 하루 7만원을 주기로 하고 간병인을 데리고 갔다. 부모님은 노발대발 하시면서 남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고 하셨다. 할 수 없이 내가 공주에서 간병인이 되었다. 지난동안 몇 년은 하숙생활을 했고, 내 집 마련을 한 후에는 3학년을 주로 맡아 7시까지 자습지도를 하면서 짬뽕을 시켜먹는 생활을 오랫동안 했기 때문에 제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은 적이 거의 없다. 어설프게 음식을 해서 드리면 “맛있다”하셨다. 그러다가 12월 4일 아버지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중환자실에 입원하셔서 나의 보호자가 아버지이셨는데 겨울방학 때는 내가 아버지의 보호자가 되었다.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서 첫 밤을 샐 때에는 아무 상식이 없어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덮고 긴 의자에서 새우잠을 잤다. 다음날은 침낭을 준비했다. 그리고 2000년 2월 아버지의 소천을 경험했다. 그 해 5월에는 북한산에서 내가 죽을 뻔했다. 학교에서 인정받아 환경부장, 진로상담부장, 교육과정부장을 하였다. 그러나 2006년에는 맡은 업무가 공주에게는 너무 과다하였다. 위기 대처 및 관리 능력이 부족하달까? 너무 곱게만 자랐기 때문에 여러 유형의 사람들과 그로 인해 생기는 일들이 힘들었다. 또 구십 노모의 연약함이 힘들었다. 한 달에 두 번 서울에 갔다가 대전으로 갈 때 손을 부여잡고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우시기 때문이다. 7월 10일 아침 내년에 명예퇴임을 할 사람은 내일 11일까지 신청하라고 했다. 몇 년 전부터 그만두고 싶었는데 명분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금식기도를 해야지’하고 저녁 6시에서 8시까지 기도를 하다 보니 더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윗의 아기가 죽은 후에는 더 금식할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이 생각난 것이다. 배가 고파서 만두를 쪄서 먹었다. 그 후 작은오빠에게 전화하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 후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따라가라.”했다. 명퇴 신청한 것을 10월쯤에 동료교사들이 알게 되었다. 승인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들 했다.(너무 젊기? 때문에) 그런데 연금 지급 문제가 생기면서 신청한 사람들은 모두 승인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나는 학생들이 강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칭찬하기보다는 잘못을 바로 잡기위해 엄하게 지도를 한 편이다. 나를 ‘무서운 선생님’으로 기억하는 학생들이 많을 것이다. 근래에는 이상하게 별로 다정하게 대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개그맨을 보듯이 나만 보면 즐거워하고 웃는 학생들이 많았다. 특히 2006년 힘든 때에 수업 시간만 되면 “선생님 사랑해요.”하면서 사랑 표현을 하는 학생들의 힘으로 살았다. 후배 교사들로부터 ‘사랑’, ‘존경’이란 말을 들었으니 인생 1막은 성공리에 공연을 마쳤다.
내가 겁이 나서 못하는 것이 몇 있다. 귀를 뚫는 것과 혼자 어디 가는 것과 운전하는 것이다. 그 중 귀를 뚫는 것은 2006년 4월 8일에 했다. 오기가 나서 몇 년 동안 하고 싶어도 못 했던 것을 막상 해보니까 별 것도 아니었다. 너무 긴장을 했는데 순식간에 했고 생각한 것보다 거의 아픈 것도 몰랐다. 약간의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그동안 선생님들하고 동남아, 제주도, 울릉도, 땅 끝 마을 등 또 수학여행으로 경주, 설악산, 지리산, 남해 등 많은 곳을 가봤지만 혼자서는 대전의 동학사도 못 가던 내가 2005년 미국에 혼자 갔다. 그러나 조카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가야만 한 것이고,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서 감행한 것은 2007년 4월, 6월로 서울 남산을 혼자 올라간 것이다.
운전은 나는 잘 해도 남에 의해서 잘못될 수도 있기 때문에 면허를 따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할 수 있을까? 아직은 지하철로 가고 싶은 곳 어디에나 갈 수 있으니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어머니는 1등만 했기 때문에 진학할 형편이 아니었지만 춘천에서 원산의 루씨고등여학교에 가고, 서울 세브란스의전과 감리교신학교에 가서 혼자 돈을 벌면서 생활하고 공부하셨다. 아버지는 42세에 미국 Southern Methodist Univ.에 유학을 가서 식당에서 일하면서 공부하셔서 신약석사학위를 받으셨다.
부모님의 강인한 삶을 본받아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자 합니다. 이제 인생 2막을 연기하려는데 어떤 대본인지, 또 언제 개막할지를 기대하면서 어떤 역할이든지 잘 해내기를 위해서 준비하고자 노력하고, 늘 깨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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