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22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3월 하나님의 손길(3) 방향을 바꾸다
제1단원 감리교가 들어오기까지
찬송 : 459장 누가 주를 따라
성경봉독 : 에베소서 1:15~19
요절 :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에베소서 1:18)
1884년 12월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은 기독교선교에 장애가 될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클레이를 도와 선교허락을 받아낸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역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큰 부상을 당해 사경을 헤매던 수구파의 거두 민영익을 살려낸 사람이 미국 공사관 전속의사이자 미북장로회 선교사였던 알렌이었습니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처럼 민영익을 살려낸 것이 기회가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료기관인 광혜원이 생기게 되었는데, 광혜원이 한국정부로부터 공식적인 허락을 받은 4월 3일, 일본 나가사키를 떠난 배 한 척이 서울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 배 안에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정식으로 파송된 선교사가 타고 있었습니다.
‘근대 한국의 선구자’라는 칭호를 받는 아펜젤러(H.G.Appenzeller) 선교사는 한국감리교회의 모교회인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하고 한국근대교육의 발상지가 된 배재학당을 설립하였으며 성서공회와 예수교서회 등 초교파연합사업의 기초를 놓음으로 한국기독교선교의 기반을 닦고 성경번역작업을 하러 목포로 가던 중 군산앞바다에서 해상조난사건으로 순직한 감리교회 대표적인 선교사였습니다.
아펜젤러는 원래 일본으로 선교지를 정하였다가 한국으로 바꾸었습니다. 스위스의 용맹스런 전사 ‘아펜젤’가문 출신으로 5대조 할아버지가 청교도 이민 당시 미국으로 이주하여 독일과 네덜란드의 개혁교회가 주류를 이루고 있던 펜실베이니아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래서 아펜젤러도 자연스럽게 개혁교회 전통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개혁교회 계통의 프랭크마샬대학에 재학 중이던 1879년 4월, 영적불안을 느끼던 아펜젤러는 랭커스터제일감리교회에 나가면서 감리교회의 기도모임과 속회활동을 통한 경건운동에 감동을 받아 감리교회로 신앙의 터전을 옮기게 됩니다. 이후 감리교계통 드루신학대학에 입학하였고, 기회가 주어지면 선교사로 나갈 결심을 하였습니다. 드루대학에서 만난 워즈워드와 같은 기숙사방을 사용하였는데 워즈워드는 한국을, 아펜젤러는 일본을 선교지로 정하고 있었습니다. 스위스의 전사 가문출신이었기에 일본의 전통 무사계급인 사무라이들이 기독교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소식과 근대화라는 세계의 흐름을 적극 수용하여 정치, 사회, 문화적 개방을 추진하는 일본에 매력을 느꼈던 반면 토마스 선교사를 무참하게 죽이고 이를 추궁하러 간 미국함대를 공격하고 여전히 ‘은둔국’으로만 알려진 나라 한국은 관심 밖이었습니다.
1883년 10월 어느 날 한국선교에 열정을 보이던 워즈워드가 개인사정으로 선교사지원을 포기하자 이를 위로하러 갔다가 워즈워드의 고뇌에 찬 표정에서 ‘네가 대신하여 한국에 갈 수 없겠느냐?’는 호소를 읽었지만 이미 일본으로 결정했기에 쉽게 번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1883년 10월 24~28일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서 개최된 전국신학교연맹 주최 선교집회에 드루신학교 대표로 참석한 아펜젤러는 집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친구 워즈워드 대신 한국에 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칼뱅주의에서 웨슬리주의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선교지의 방향이 바뀌는 체험을 한 아펜젤러. 이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선교 개척자로 파송된 스크랜턴 모자선교사(어머니 메리 스크랜턴과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도 직접 선교지에 나갈 생각조차 없던 이들이었습니다.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해 선교 허락을 받은 상황에서 그 사업을 감당할 교사와 의사 선교사가 필요했지만, 지원자가 없었습니다. 1884년 초 평소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이 많아 후원회도 조직하며 활동했던 메리 스크랜턴의 집에 미감리회 해외선교 관계자가 방문했습니다. 그가 거실에서 메리 스크랜턴의 며느리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남편과 함께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볼 의향은 없는지요?”라고 물었는데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을 하며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 해 여름 윌리엄 스크랜턴이 장티푸스에 걸렸고, 딸까지 전염되어 어머니 스크랜턴은 아들을 돌보고, 딸은 윌리엄 스크랜턴의 아내가 간호를 맡았습니다. 회복이 된 후 윌리엄 스크랜턴은 아내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면서
“여보, 나 선교사로 나갈 생각이요, 남은 내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했소. 중앙아프리카를 제외하고 어디든 주님이 가라는 곳으로 갈 생각이오”
라고 말을 꺼냈습니다. 아내는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침묵하다가 “당신이 가는 곳이라며 저도 가겠어요. 거기에 제 뼈를 묻겠어요”라고 답했습니다. 이렇게 윌리엄 스크랜턴 부부는 선교사로 나갈 결심을 했고,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도 미감리회 해외여선교부에 선교사로 지원하여 3대에 걸친 일가족 4명이 한국선교사로 파송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병상에서 이들을 부르셨던 것입니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예일대학과 뉴욕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클리블랜드에서 개업했던 장래가 촉망되는 의사였습니다. 그리고 결혼하여 한 살짜리 딸도 있는 행복한 가족이었습니다. 그는 그 모든 안정적인 조건들을 내려놓고 주변을 정리하고 선교사로 지원을 했던 것입니다. 뉴욕 해외선교본부에서 파울러 감독에게 목사안수를 받았는데 이날이 1884년 12월 4일, 한국에서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이 일어난 날이었습니다.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모자선교사의 한국행 역시 한국감리교회의 다른 장면들처럼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이었습니다. 한국감리교회는 인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과 그것에 응답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감리교회의 자랑은 바로 하나님의 손길과 부름에 응답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순종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성찰을 위한 질문
1) 아펜젤러와 같이 인생의 방향을 바꾼 경험이 있다면 말해보세요.
2) ‘아! 이것이 하나님의 이끄심이구나!’라고 경험한 것을 말해보세요.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22년 월례회 공과』
자랑스러운 한국감리교회 열 두 가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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