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어그램

에니어그램으로 보는 성서 인물 1번 유형 : 사도 바울

나효선 2015. 6. 15. 23:58
  

에니어그램으로 보는 성서 인물 1번 유형 : 사도 바울

 

1. 다마스쿠스로 가는 사울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바울만큼 주목받는 이도 흔하지 않고 쉽지 않다. 사도행전을 통하여 바울의 행적이 자세히 객관적으로 소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편지를 통하여 또한 많이 알려져 있다. 먼저 그의 알려진 것과 그의 삶이 알려진 것부터 독특하다. 이름이 바뀌거나 다르게 알려지는 것은 이름마다 각기 다른 모습이나 삶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사울은 회심 또는 개종 이전의 이름이요, 바울은 그 이후의 이름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바울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준 크리스텔 스텐달은 미국의 하버드 대학 신학부에서 가르칠 때 바울의 이름과 관련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여 주목을 받았다. 그에 의하면, 사울이나 바울이란 이름이 개종 이전과 이후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울은 유대인 세계까지 살 때의 이름이고, 바울은 그레코로만 세계에서 쓰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 우리 말 번역으로는 똑같이 사울이란 이름으로 표기되지만, 헬라어 원전을 보면, 저자인 누가가 헬라어로 표기할 때는 Saul로 쓴다. 사도행전 9:1, 3, 11, 17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빛 가운데서 만난 주께서 사울을 부를 때는 히브리어 식으로 표기하면서 Saoul로 표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9:4, 9, 17 등에서 볼 수 있다.

 

에니어그램의 시각에서 보자면, 사울이란 이름으로 불릴 당시에, 그는 에니어그램 1번 유형의 격정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사도행전 9:1-2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신도들을 위협하고 살기를 띠었으며, 대제사장에게 찾아가서 체포 영장으로 편지를 써달라고 요청한다. 그것도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외국에까지 쫓아간다. 다마스쿠스로 가서 닥치는 대로 부활을 믿는 신도들을 묶어서 끌고 오려고 한다.

 

1번 유형은 완전주의 성향이 강한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목숨을 걸듯이 열정을 쏟는다. 옳은 것에 대한 욕망과 관심이 크고 원칙에 강한 만큼, 옳지 않은 것을 보면 짜증이 나다못해 분노가 끓어오른다. 더욱이 스스로 빌립보서 3장의 자서전적인 부분에서도 밝히듯이 히브리인 의식이나 바리새파 의식이 강한데다 동족애가 강한 그로서는 잘못 믿는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가만 놔둘 수가 없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자신에 대한 글을 쓰면서도 밝힌 바와 같이 그는 교회를 박해하고, 없애버리려고까지 한다. 사도들 가운데 지도자인 베드로를 책망하기도 한다. 자신의 의에 대한 확신과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한 판단이 명백하게 서면, 물러서지 못하고 양보하지 못한다.

 

에니어그램 1번 유형은 개혁가적 성향이 강하다. 그가 완전이란 함정에 빠지면 분노가 끓어오른다. 그러나 완전주의자인 1번은 분노를 표현하면 그것이 결코 완전한 일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되도록 분노를 피하려 한다. 그러나 감정을 억제하고 분노를 기피하려고 참으면, 억압된 분노는 마침내 압축 공기가 큰 소리를 내며 터지듯이 큰 소리를 내게 되어 있다.

 

1번 유형은 화가 날 때 얼른 돌려서 생각하고 마음을 고쳐먹으면 금방 사그라질 것도, 못내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면, 그것은 금세 에스컬레이터 되어서 스스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더 큰 화를 내게 된다.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갈 때 모습이 바로 완전이란 함정에 빠져서 분노를 터뜨리며 박해하며 죽이기까지 하려들던 1번 유형의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다.

 

 

2. 세계로 가는 바울

 

세계 선교의 전진 기지인 안디옥에서 성령의 지시를 따라 안수 받고 선교사로 세워진 사울이 바나바와 함께 선교 여행을 떠난다. 그들이 실루기아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가 바보에 이르러 선교할 때만 해도 사울이란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로 건너갈 때에는 이미 바울이란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된다.

 

앞서도 지적하였듯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 지방과 팔레스틴 지역에서 활동할 때는 사울로 불리던 그가 활동 무대를 그레코로만 세계로 옮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바울이 된다. 그러니까 유대인으로서 바리새파 사람으로 활동할 때의 사울이, 로마 시민으로서 그리고 세계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어 선교사로 활동하면서는 바울이 된 것이다.

 

한국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 유대 사람들에게도 이름이 매우 중요하다. 이름이 존재를 대표하는 만큼 중요하고 더욱이 전통 문화 속에서는 이름이 사람의 특징과 함께 운명을 나타낸다고 믿기까지 하였다. 이런 문화적 배경 속에서 볼 때, 바울이란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하는 시기는 에니어그램으로 볼 때 유대교적 열광주의에 사로잡혔던 사울이 변화하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안정감을 찾는 상태로 들어선다.

 

이쯤 되면 에니어그램 1번 유형인 바울이 격정(열광주의)에 사로잡혀 스트레스를 받고 불건강할 때는 강박관념에 빠져서 남을 도무지 관용하지 못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바닥에 떨어질 만큼 매우 불건강할 때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복수하거나 벌을 주는 사람이 되고 만다. 다마스쿠스로 가던 때의 정황을 떠올리면 영락없이 사울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빛 가운데서 만나고 전향한 바울이 마침내 선교사로 안수 받고 나선 시점에서는 적어도 평균 상태의 1번 유형으로서의 특징을 띠게 된다. 긴장하며 살 때, 완전주의에 입각하여 남을 판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좀 더 발전하여 향상되면 엄격한 논리를 내세우면서도 질서정연한 사람이 된다.

 

선교 여행 초기에 바울은 적어도 논리가 분명한 사람이면서도 이상주의적인 개혁가의 특징을 드러낸다. 그에게 있어서 이상주의라 함은 신앙과 영성의 바탕에서 성령이 보여 주시는 비전을 보며 그 비전을 세계와 역사 속에서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후일에 바울 자신이 빌립보서 3장에서도 밝히듯이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지녔던 열정이 선교사로 나선 바울에게는 선교적 비전을 실현하는 열정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린도와 에베소, 데살로니가와 갈라디아, 골로새와 예루살렘, 키프로스와 크레타, 몰타, 아테네, 시라큐스와 로마 등지를 돌며 선교 여행을 하는 열정을 보라. 더욱이 지중해 세계를 누비며 선교 여행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관광할 여유가 없다. ‘원칙이 선교사’로서의 모습이 역력하다. 이런 상태는 건강한 수준에서도 곧잘 나타난다. 1번 유형의 특징을 바울이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측면이다.

 

선교 여행에 함께 나섰던 마가라고 하는 요한이 바보를 떠나 버가로 건너가는 일행과 헤어져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나중에 바나바와 다툰 끝에 갈라서고 말았다. 이유인즉 요한이 자기들을 버리고 함께 일하러 가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를 쓰면서 화가 났던 것이나, 안디옥에서 이방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유대주의자들이 두려워서 베드로가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바울이 그를 질책한 데서도 격정을 분노로 표현하는 1번 유형의 특징을 본다.

 

 

3. 의식을 깨우는 바울

 

‘에니어그램은 우주의 상징이다. 에니어그램은 영속적 운동성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우주의 생명이 끊임없이 이동하며 사람 또한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어떤 사람도 살아있는 동안에 잠시라도 어느 한 자리에 또는 어느 한 상태나 수준에 고정되어 머무는 법이 없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우리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속상태 속에 있음을 재확인한다.

 

바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안디옥을 거쳐 세계 선교 여행길에 나설 때만 해도 완전주의자 성격으로 자라온 그였기에, 완전하지 못한 것을 보면 격정에 사로잡혀 질풍노도처럼 화가 나서 달려가든가 역정을 내며 질책하든가 분노의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격이 원만해지면서 어느덧 신학도 영성도 무르익어 원숙한 경지에 이르면서부터 바울은 의식이 깨어나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며 역설하기에 이른다. 이토록 내면의 깊은 통찰과 분별력을 가지고 의식의 잠에서 깨어날 것을 가르치는 일에 열정을 쏟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일상생활에서의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서는 너그러워지게 되며 스스로 평정을 이루게 된다.

 

에니어그램에서 말하는 인성, 즉 흔히 말하는 성격과 그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는 격정을 두고 ‘겉사람’이라 이해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랑을 이루고자 갈망하는 본성을 ‘속사람’이라 이해하게 된 바울은 무엇보다 이 속사람과 겉사람 사이의 갈등과 싸움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에니어그램으로 보면 인간의 의식은 4단계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잠자는 상태, 둘째는 선잠 깬 상태, 셋째는 자기를 의식하는 상태, 넷째는 객관적 세계와 우주를 의식하는 상태로 크게 나눈다. 대부분의 사람은 타성에 젖어서 기계적인 삶을 산다. 생각(지성), 느낌(감성), 행동(활동) 사이의 균형과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살아간다. 왜 사는지도 모르고, 삶의 의미도 목적도 모른 채 산다.

 

이런 상태를 심지어 죽음이라고까지 한다. 그래서 바울은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어서라’(엡 5:14) 하는 찬양시를 인용하며 가르친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롬 13:11) 하고 권면한다. 자신이 열광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 때는 격정에 사로잡혀서 사는 줄도 모를 만큼 의식의 깊은 잠에 빠졌던 것을 깨달은 바울이 이제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의식의 잠에서 깨어나야 할 것을 역설한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신도들을 박해했던 그가 은총 가운데 주님을 만나고 부활을 믿게 되면서 의식의 잠에서 깨어나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된 것을 깨닫는다. 에니어그램에서 말하는 거짓 인성(성격)으로서의 겉사람을 벗어버리고 본성으로서의 ‘참 인성’이 되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치며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골 3:10)’ 하고 강조한다.

 

참 지식에 이르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생각 Thinking, 느낌 Feeling, 행동 Doing 즉 지성, 감성, 본능 이 세 가지가 조화되고 균형을 이루도록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하고, 기계적 삶에 저항하며 살아야 하며, 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일에 열정을 쏟아야 한다. ‘늘 깨어 있어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연상하면서 바울이 가르친 것처럼, 늘 깨어 있기 위해 우리는 거기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4. 변화와 성숙을 가르치는 바울

 

에니어그램의 진리 체계가 가르치는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며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와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본래적인 이 가르침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부분이 교회 성장이나 개인의 구원과 축복에 집착하는 듯하다.

 

바울이 에니어그램에서 말하는 변화와 성숙을 이루며 통합의 방향으로 옮겨가면서 건강 상태에 이를 때, 그의 어조가 달라진다. 신약에 실린 바울의 많은 편지를 볼 때, 건강 레벨의 다양성을 느낄 수 있다.

 

이를테면 갈라디아서를 흔히 ‘분노의 편지’라고 신학자들이 일컫는다. 이 편지를 쓸 때만 해도, 다마스쿠스의 체험을 한 상태로부터 성격상 통합은 채 이루지 못하여 못마땅하거나 잘못됐다고 느끼는 것을 보며 화를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리는 형편이었던 것을 본다.

 

이와 대조적으로 빌립보서나 고린도후서를 기록할 때에 가서는 변화와 성숙을 이룬 상태를 드러낸다. 에니어그램 1번 유형이 격정에 사로잡히면 분노를 기피하면서 참으려고 애쓰며 다짐하면서도 화를 낸다. 그것은 완전이란 함정에 빠지기 때문에 참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화가 나서 마침내 폭발하듯이 터져 나온다. 그러나 완전이란 개념을 성숙으로 바꾸어 생각하면 평정을 이룬다.

 

불완전의 영성을 가슴 깊이 끌어안고 사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참다운 회개가 이루어질 때 평화와 안정이 이루어진다. 회개는 곧 전향과 변환을 뜻한다.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완전하심을 깨닫고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이다. 이쯤 되면 바울이 내부의 갈등과 다툼을 드러내는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사랑의 편지’를 쓴다. 갈라디아서를 쓰던 때와 대조를 이룬다.

 

이와 같이 바울의 후기 문서를 보면, 그 자신이 통합을 이루며 매우 건강한 상태가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엡 4:13) 될 것을 믿고 희망하며 영성의 길을 온화한 마음으로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전과 다름없는 믿음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통합의 방향으로 이행할 때에 비로소 평정을 이루는 것을 본다.

 

속사람과 겉사람 사이의 영적 투쟁으로서 ‘성전’을 끊임없이 수행하며 그리스도의 완전을 향하여 성령을 따라 걸어간 바울은 에니어그램에서 말하는 ‘자발적 고난’을 견뎌낸 사람이다. 그의 자서전적인 기록들 가운데서도 고린도후서 11장을 보면 그 숱한 박해와 고난을 ‘필요한 고난’으로 받아들이고 인내하며 정진한 모습을 역력히 그려볼 수 있다.

 

바울이 스스로 변화와 성숙을 이루며 건강한 마음과 성격으로 살 때, 그의 가르침에 힘이 있고 감동을 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변화와 분별의 영성(롬 12:1-2)이나 고난의 신학(롬 5:3, 고후 4:17)을 가르친 것을 보거나 본성의 회복과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짐(고후 4:16)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말하는 바울을 다시 보면서 우리는 균형과 조화가 이루어진 통합된 성격과 온전한 영성을 본다.

 

사랑의 바탕에서 화해와 일치와 관용을 가르치는 바울은 자신이 겪은 필요한 고난과 자발적 고난을 이겨낸 사람으로서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사는 영성을 드러낸다.(빌 4:12-16) 그리스도를 닮기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를 열망하며 가파르게 영성의 길을 끊임없이 걸어간 바울이야말로 ‘달려갈 길을 다 가고, 선한 싸움(성전)을 다 싸운’(딤전 6:12) 성숙한 사람이다.

 

출처 : 공동체성서연구원 김영운 목사님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