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2014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9과 ‘바위고개’ 작곡가 이흥렬

나효선 2014. 9. 28. 22:00

기독교대한감리회 2014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9과 ‘바위고개’ 작곡가

이흥렬

 

 

* 성경봉독 : 시편 98:1~9

* 참고성경 : 요한계시록 7:9~12

* 요절 :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시 98:1)

 

 

서론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님이 그리워 눈물 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님 그리워 그리워 눈물 납니다.” 한국인이 애창하는 가곡 중의 하나인 ‘바위고개’의 1절입니다. 극작가 이서향의 글에 이흥렬이 곡을 붙였습니다.

이흥렬(李興烈)은 일찍부터 음악적 소질을 드러냈기에 교회와 학교에서 활동하며 음악가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피아노 연주가가 되려 하였으나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후 암담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목격한 후 작곡가로 진로를 바꾸었습니다. 자신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보다 일반 백성이 슬픈 가슴을 달래며 부를 노래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고, 노래가 일제에 항거하고 민족정신을 살릴 한 방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가곡을 작곡하고 발표하여 많은 한국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 가곡사에서도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선구자였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한국의 슈베르트’가 되었습니다.

 

 

본론

이흥렬은 1909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전도부인으로 활동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앙 안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일찍부터 음악에 특출한 소질을 보였습니다. 교회 성가대나 오르간 연주에 참여했고 남다른 감상능력도 보였습니다. 원산 광명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일본에 유학하였습니다. 1927년 일본 도쿄음악대학에 입학하여 고학으로 공부하며 피아노를 전공하였고 1931년 귀국하였습니다. 한편 졸업 연주를 앞두고 A급이 모여 있는 3부에 나가기 위해 노력하던 그는 학교에서의 피아노 연습만으로는 부족하여 고민이 많았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고향의 어머니가 어려운 형편에도 피아노 값 400원을 송금해 주어 야마하 100호 피아노를 구입해 졸업 연주를 무사히 마친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귀국 이후 모교인 원산 광명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암담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보다 슬픈 가슴을 달래며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노래로 일제에 항거하고 민족정신을 살리고자 작곡가의 길로 들어섰던 것입니다. 독학으로 작곡을 연구한 그는 가곡 ‘내 고향’을 첫 작품으로 1932년부터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민족의 한과 염원을 노래한 ‘바위고개’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자장가의 효시로 소박한 아름다움과 원초적인 정서를 느끼게 해 주는 ‘자장가’, 코스모스의 청초한 모습을 산뜻한 선율로 담은 ‘코스모스를 노래함’,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부끄러움’, 동경에 찬 봄의 서정을 읊은 ‘봄이 오면’, 망향가이지만 곱고 평이하고 친근감 있는 선율로 건강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고향 그리워’, 작곡가의 쾌활한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꽃구름 속에’ 등 주옥같은 명곡을 작곡하였고, 1934년 그의 첫 작품집 <이흥렬가곡집>을 출판하였습니다. 창작곡이 거의 없던 당시로서는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한국 가곡사에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선구자로 역할 했습니다.

 

그가 시도한 새로운 방향은 서양음악을 그대로 답습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우리 정서에 바탕을 둔 예술가곡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애창곡 수준과 외국가곡의 모방 수준에 머물러 있던 한국 가곡을 근대적 정서와 예술성이 한 차원 증대된 예술가곡으로 탈바꿈시킨 것이었습니다. 당시 간단한 화성이나 찬송가 풍의 반주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그의 곡들은 피아노를 전공했던 관계로 화려하고도 반주 테크닉이 활달하게 살아나게 하여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악곡의 구성에서도 전조를 포함해 대조적인 악구와 간주부를 두는 등의 형식상의 변화와 함께 각 곡들이 갖는 명쾌한 캐릭터로 그냥 귀에 스쳐 흘러가지 않고 우리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항상 울림을 갖고 다시 부르고 싶은 내적 힘을 갖게 했습니다.

 

이 무렵 서울의 경성보육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서울에 거주하면서 음악을 지도하는 한편, 피아니스트로 활동하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정동제일교회에 출석하면서 당대 기라성 같은 음악가들이 참여한 정동제일교회의 성가대 지휘를 맡았습니다.

 

1936년 홍난파와 함께 경성방송관현악단을 조직하였고, 1937년에는 동요집 <꽃동산>을 출판하는 한편 경성피아노 3중주단을 조직했으며, 1938년에는 아폴로합창단을 조직하였습니다. 또한 1939년 3월부터 경성방송국이 가곡을 보급시키기 시작하면서 <가정가요 제1집>을 발간하고 방송을 통해 지도했는데 여기에 그의 가곡 ‘어머니의 마음’이 담겼으며, 그해 6월 창작운동을 독려하는 뜻에서 동아일보사가 개최한 창작발표회에 ‘바위고개’, ‘봄이 오면’, ‘자장가’ 가 다시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경성음악대 강사, 이화여대 강사, 고려대 강사 등을 지냈고 서라벌예술학교 음악부장도 역임했습니다. 1945년에는 ‘고려음악협회’를 조직하였고, 1946년에는 광복 직후 좌익계열에서 조직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와 전국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민족진영의 200여 문필가들이 회합하여 그해 3월 13일 출범한 전조선문필가협회(全朝鮮文筆家協會)의 음악분과위원장을 맡는 한편, ‘대한교육음악협회’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1953년에는 한국작곡가협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57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그해 고려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습니다.

1963년부터는 숙명여대 음악대 교수와 음악대 학장으로 1974년 정년퇴임 때까지 재직했습니다. 그는 가곡 52편, 동요 65편, 군가 7편, 교가 138편 등 무려 400여 곡의 노래를 지었습니다. 깨끗하고 담백하면서도 서정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가곡들을 많이 남겼기에 ‘한국의 슈베르트’로 불리고 있습니다. 작품집으로 <너를 위하여>(1965, 제2작곡집), <아가>(1970, 제3작곡집) 등을 출판했으며, 음악이론서 <음악의 종합연구>(1958), <새로운 음악통론>(1962)을 저술하였습니다.

 

 

결론

이흥렬은 한국을 대표하는 작곡가입니다. 그는 가곡 동요 교가 군가 등 400여 편의 많은 노래를 작곡하였습니다. 그가 작곡한 것들 중에는 널리 애창되는 곡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정서와 한을 잘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한국 가곡사에 전환점이 된 선구자로도 역할 했습니다. 서양음악을 그대로 답습하는 당시의 일반적 수준에서 벗어나 우리 정서에 바탕을 둔 차원이 다른 예술가곡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는 가곡을 보급하는 데 앞장섰을 뿐 아니라 평생 동안 학교에서 후학들에게 음악을 지도하는 일에도 헌신하였습니다. 음악 이론서도 저술하여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음악이 우리 생활, 특히 신앙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해 봅시다.

 

2. 교회 성가대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을 계획하고, 선교회 차원의

찬양단을 구성하여 선교에 직접 참여하는 방법도 이야기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4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