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3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4과 남감리회 선교의 주역
윤치호
● 성경봉독 : 사도행전 1:6~11
● 참고성경 : 베드로전서 4:7~11
● 요 절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서론
윤치호(尹致昊)는 한국 감리교회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1887년에 세례를 받아 한국 최초의 미국 남감리회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개인적인 삶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남감리회가 한국에서 선교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고 또 교회가 설립되고 발전하도록 헌신하였습니다.
그리고 YMCA의 설립과 발전에 적극 참여하여 기독교를 통한 새로운 한국을 건설하는 YMCA운동을 지도하면서 당시 기독교계 원로로도 활약했습니다.
윤치호는 일본과 중국, 미국에 유학하여 신학문을 받아들인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이었기에 배재학당과 독립협회를 통해 근대화, 민주주의를 확산 · 실천하는 데 기여하였고, 교육 활동에도 참여하여 미래의 인재를 양성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본론
윤치호는 충남 아산에서 1865년 윤웅렬(尹雄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1881년 봄 일본에 유학하였다가 1883년 5월 주한 미국 공사 푸트(L. H. Foote)의 통역관으로 채용되어 귀국하였습니다.
갑신정변 직후인 1885년 1월, 윤치호는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가 경영하는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하였지만 좌절과 갈등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1887년 4월 3일 본넬(W. B. Bonnel)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결단을 나타내는 신앙고백문을 작성하였는데 그 내용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이제 다음과 같은 소망을 갖고 세례를 받고자 합니다. 제가 지닌 시간과 재능이 얼마든 간에 그것을 이 종교에 대한 지식과 신앙을 개발하는 데 쓰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저 자신을 위하여, 또한 형제들을 위하여 유익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밤이 다가와 죽음의 문 앞에 섰을 때에도 구원을 찾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 결과 과거의 나와는 전혀 다른 인물로 인식될 뿐 아니라 길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이 어디로 가야 할지 결정을 못해 빠질 수도 있는 유혹의 횟수를 줄이고자 합니다. 저는 다음 사항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구세주이십니다.”
이로써 윤치호는 한국인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 윤치호는 보다 적극적으로 학교생활을 하였고 신앙생활에도 열심을 보였습니다. 1888년 10월 중서서원을 졸업한 후에는 미국에 유학하여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에서 공부하였습니다. 공부하는 동안 여러 도시와 대학을 순회하며 강연하면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 정치적 현실을 알렸고, 특히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강연해서 모은 돈 2백 달러를 에모리대학 캔들러(W. A. Candler) 총장에게 맡겨 한국 선교비로 써 달라는 부탁까지 할 정도로 그의 선교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윤치호는 1895년 2월 망명길에 오른 지 10년 만에 귀국하였습니다. 그는 즉시 상해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한국의 선교 상황을 알리며 남감리회의 한국 선교를 촉구했습니다. 이 요청이 받아들여져 1895년 10월 헨드릭스(E. R. Hendrix) 감독과 리드(C. F. Reid) 선교사가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이들은 서울 한복판 남송현에 선교 부지를 구입하였고, 윤치호의 첫 딸에게 유아세례를 베풂으로 남감리회의 본격적인 한국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북감리회보다 10년 늦게 선교를 시작한 남감리회는 처음에는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활동하여 1897년 5월 남감리교 최초 교회인 고양읍교회를 창립하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윤치호는 고양읍교회 예배당을 마련하도록 사재를 헌납하였고, 서울교회(현재의 광희문교회)와 자골교회(현재의 자교교회와 종교교회)의 설립 및 개성의 선교 개척 등 남감리회 확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1930년에는 남감리회를 대표하여 합동전권위원으로 선임되어 남·북 감리회가 하나의 ‘기독교조선감리회’로 합동하도록 힘을 보탰습니다.
또 윤치호는 1903년 YMCA의 창립에 관여한 이후 이사 등을 맡아 적극적으로 YMCA 운동에 동참하여 사회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16년부터 1920년까지는 총무로 활동하며 실무를 지휘하였고, 이후 회장(이사장)으로 YMCA를 대표하였습니다. 또 교회연합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1907년 4월 아시아에서 열린 최초의 기독교 관련 대회인 세계기독학생연맹 대회에 참석하여 유창한 영어와 명쾌한 웅변으로 회중을 매료시켰습니다. 1908년 세계주일학교연합회 조선지부장으로 일했고, 1910년에는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남감리회 평신도협회 총회에 참가한 후, 이어서 영국 에딘버러에서 열린 첫 세계선교회의(I.M.C)에 참석해 외지 선교문제와 경제문제에 대해 의견을 토로했습니다.
1906년 10월부터는 남감리회에서 개성에 설립한 한영서원(韓英書院)의 원장이 되어 교육사업에 전념하였습니다. 105인 사건으로 교직을 떠났다가 1922년부터 1925년까지 이 학교의 후신인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장으로 봉직하였습니다. 1941년 2월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1944년 10월까지 활동하였습니다.
한편 윤치호는 나라의 개화와 독립을 위한 민족운동에도 헌신했습니다. 배재학당에서 서구 학문과 서방 세계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가르쳤고, 서재필과 함께 협성회를 지도하여 민주의식과 애국사상을 습득하도록 했습니다. 또 자주 독립 사상을 널리 유포한 독립협회의 창설을 주도하였고, 부회장 ·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체제 개혁을 요구하는 만민공동회 등 대중 집회를 열었으며, <독립신문> 발간에도 참여하였습니다. 1911년에는 일제가 국내의 애국인사를 한꺼번에 제거할 목적으로 조작해낸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연루되어 6년형을 언도받아 감옥 생활을 하다가 1915년에 특사형식으로 풀려나왔습니다. 이후 그는 민족운동에 소극적이었을 뿐 아니라 친일적 성향으로 기울어졌습니다. 일제 말기에는 노골적인 친일행위를 하여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고, 해방 후에는 친일파로 규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결론
윤치호는 한국 감리교회, 특히 남감리회의 성장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887년에 세례를 받아 한국 최초의 남감리회 신자가 되었고, 남감리회의 한국 선교를 요청하고 서울과 개성에 선교기반을 마련하였으며, 발전을 위해서도 적극 협력했습니다. 그의 중국인 아내도 남감리회의 여성 선교에 기여하였고, 그의 첫 딸은 이 땅에서 이루어진 남감리회의 첫 세례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와 그의 가족 모두가 남감리회의 선교에서 기록에 남을만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민족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이 땅에 민주주의와 애국 사상을 뿌리내리게 했습니다. 배재학당과 독립협회, YMCA, 교육 사업을 통해 활동하면서 한국인을 새로운 한국을 건설하는 데 나서도록 했습니다.
윤치호는 이처럼 교회와 사회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었지만 아쉬운 점도 남겼습니다. 곧 올곧은 민족적인 행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일제 말기에 적극적으로 친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의 활동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고 그가 작사한 애국가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교회의 선교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 까요?
함께 의견을 나누어 봅시다.
2. 사회 속에서 신앙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3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
'기독교대한감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대한감리회 2013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5과 땅에 떨어져 죽어간 밀알 김노득 (0) | 2013.05.29 |
---|---|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도봉지방 연합 부흥성회 1(2013년) (0) | 2013.05.22 |
기독교대한감리회 제33회 서울연회 2 (0) | 2013.04.21 |
기독교대한감리회 제33회 서울연회 1 (0) | 2013.04.15 |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7000인 성령기도꾼 기도성회 (0) | 2013.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