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3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5과 땅에 떨어져 죽어간 밀알
김노득
● 성경봉독 : 요한복음 12:23~26
● 참고성경 : 요한복음 14:1~11
● 요 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
를 맺느니라(요 12:24)
서론
김노득(金路得)은 땅에 떨어져 죽어간 밀알처럼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여성 지도자입니다. 대학 때부터 농촌운동에 나서서 자신을 버렸습니다. 교회와 학교를 세워 복음을 전파하였고, 문맹 퇴치에 앞장섰습니다. 농촌 사람들과 삶을 같이 했기에 많은 결실도 맺을 수 있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총리원의 부녀국 협동총무로 선임되어 여선교회 재건과 전도 사업을 위해 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6·25전쟁으로 많은 고아와 미망인이 발생하자 서울 마포에 성광모자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성광모자원은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한 순교자의 가족, 목회자였던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전쟁미망인과 그 가족들이 함께하는 생활공동체였습니다. 이들은 이곳에서 자립의 기반을 마련하고 새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본론
김노득은 서울 종로에서 1903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정은 일찍부터 예수를 믿은 기독교 가정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할아버지는 종교교회의 유사부장직을 맡고 있던 김상연으로 지나칠 정도로 철저하고도 엄격한 신앙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주일이면 집안의 모든 식구가 손에 쟁기를 잡지 못하게 했고, 마루 걸레질이나 부엌에서 그릇을 씻는 것까지 금할 정도였습니다. 또 성경 읽는 것을 이 세상에서 다시없는 낙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할아버지 덕분에 김노득은 어릴 때부터 기독교 신앙으로 양육 받았습니다. 유년기에는 남감리회의 여학교인 배화학당에서 초등교육을 받았습니다. 배화학당의 교장이었던 캠벨(J. Cambell)은 그의 재능에 놀라 1학년에 입학한 것을 3학년으로 월반(越班)시켰다고 합니다.
열두 살이 되던 해에 황해도 용인군 김양으로 이사하게 되어 한동안 바깥세상을 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향학의 꿈을 버릴 수 없었던 그의 의지와 간절한 기도가 응답되어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1928년 배화학교를 졸업하고는 감리교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신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김노득은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과 황해도 수안의 산골로 가서 실제적인 농촌운동을 경험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부녀자와 아동들을 대상으로 서당식 학교를 운영하고 야학도 열었습니다. 김노득은 세 달 후 서울로 돌아왔지만 수안에서의 생활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농촌에서 농민과 함께 살면서 농촌의 현실을 바꾸는 데 삶을 바치기로 결심한 후 학업을 중단하고 다시 수안으로 내려갔습니다. 이후 해방될 때까지 김노득은 이곳에서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여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치는 데 그의 젊음을 다 바쳤습니다. 김노득의 이러한 활동을 감리교 기관지 <감리회보>(1935.1.10.)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경성 기독교조선감리회 신학교에 학적을 둔 김노득 양은 사리원지방 수안구역내 용현(龍峴)교회에서 낮에는 80여 명의 무산아동을 모아서 문맹퇴치에 열중하고 밤에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야 20, 30리를 도보로 다니면서 전도하는바 캄캄한 밤에 등도 없이 다니다가 광야와 산간에서 실로(失路)를 하고 방황하기를 한두 번이 아니며 그는 매일 밤 새로 2시경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는고로 평균 하루에 4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으며 그리하야 이곳에는 주의 복음의 빛과 교육이 날로 보급되야 관민간(官民間)에 찬송하기를 마지아니 한다더라.”
해방 후에는 종교교회 장로로 선임되어 종교교회뿐 아니라 감리교회를 위해 활동하였습니다. 종교교회에서는 교회학교 교사와 여선교회 회장으로 헌신하였습니다. 1948년에는 총리원 부녀국 협동총무로 선임되어 여선교회의 재건과 전도 사업을 주관하였으며, 여선교회의 서기(1948년)와 농촌부 부장(1953~1954년)도 역임하였습니다.
1952년부터는 전쟁미망인을 위한 사회복지기관인 성광모자원의 원장으로 일했습니다. 성광모자원은 사워 선교사와 함께 납치 교역자 미망인과 평신도 전쟁미망인의 주택 문제와 직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한 사회복지기관입니다. 이곳에는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한 순교자의 가족, 목회자 혹은 가장을 잃은 교인들을 교회의 추천을 받아 가족 단위로 수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작업장도 마련해 자립 기반을 갖추고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작업장에는 재봉틀을 비치하여 침대용 커버와 커튼, 테이블보·방석 커버·한복 등의 수예품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목사 가운 혹은 교회 성가대 가운도 주문받아 제작하였습니다.
김노득은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며 근면하고 절약하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좋은 음식도 먹지 않았고, 좋은 옷도 입지 않았습니다. 무엇 하나 그냥 버리는 경우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절약하여 모은 것은 모자원 식구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헌신으로 성광모자원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가자 김노득은 이곳에 성광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모자원 식구들을 신앙적으로 지도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마포 신수동 지역에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후 김노득은 성광교회의 장로로 1968년 12월 65세로 별세하기까지 교회 부지를 매입하고, 예배당을 건축하는 등 끝까지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성광교회 청년회에서는 1969년 9월 7일 교회 앞뜰에 ‘성광교회 설립자 김노득 장로 기념비’를 세우고 그의 뜻을 잊지 않고 계승하도록 했습니다.
결론
김노득은 독실한 믿음과 투철한 개척정신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처럼 나를 버리는 밀알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젊음을 농촌에 바쳤습니다.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여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쳤지만 농촌과 농촌 사람을 일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김노득은 그들과 함께 생활하였고, 그들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죽어가는 밀알이 되었습니다.
해방 후 특히 6·25전쟁 후에는 성광모자원을 설립하여 사회사업의 새 차원을 열었습니다. 성광모자원은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아버지를 잃은 전쟁미망인과 그 가족들에게 주택과 일자리를 제공하는 생활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김노득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 생활공동체를 신앙공동체로 한 단계 더 발전시켰습니다. 이곳에서 생활한 이들이 절망적인 현실을 딛고 다시 일어나 건강한 생활인, 건강한 신앙인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김노득이란 죽어가는 밀알을 통해 이곳에서 생활한 사람들은 새로운 싹이 되고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우리의 관심과 헌신을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일까요?
2.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3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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