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웨슬리 속회 공과 21
웨슬리 속회 공과
김원경 목사 편
제 21 과
온유한 자
성경 : 마태복음 5:5
(요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1. 겨울도 지나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고,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 때, 그리고 애통자의 위로자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돌아오셨을 때, 또한 주님의 임재와 함께 구름이 흩어지고, 의심과 무지의 짙은 안개가 걷히고, 두려움과 근심의 물결이 자고, 우리들의 심령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안에서 다시 환희에 넘칠 때, 오늘의 본문의 말씀은 이루어져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자의 입에서는 “온유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얻을 것이다.” 라고 증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그러면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것은 세상의 물정을 몰라서 악에 대하여 무감각하고 선악을 분별 못하기 때문에 아무런 근심도 없는 사람을 말함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신경이 둔하여서 밀어닥치는 생의 충격에도 무감각하여 목석처럼 저항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을 말함도 아닙니다.
3. 기독교적 온유는 하나님께 대하여 아무런 열정도 품지 않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에나 극단을 피하는 마음자리 입니다. 이것은 인간 정서의 균형을 잃지 않는 상태입니다.
자연계의 섭리자이신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서 인간의 정서를 제거하심이 아니요, 이를 다만 규제하시는 것입니다.
온유의 덕은 우리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여 생의 어떤 조건 아래서도 분노나 근심이나 두려움 같은 정서도 평형을 유지하게 하여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게 하는 마음입니다.
4. 이 온유의 덕은 우리 자신이 지니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께로나 이웃에게 향하게 됩니다. 이 마음씨를 하나님께로 향할 때 우리는 이것을 인종(忍從)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지 비록 이것이 내게 즐거운 것이 아닐지라도 종용(從容)히 묵종(黙從)하면서 “주님의 뜻이오니 그의 기쁘신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할 뿐입니다. 이것을 다시 나와의 관계에서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이것을 “인내” 라거나 안분(安分) 혹 “지족하는 마음” 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타인을 대할 때에는 선한 일에 대하여서는 부드러운 태도를 가지는 것은 물론이나 악에 대하여서도 역시 유화(宥和)한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5. 진정으로 온유한 자는 악에 극히 민감하여 이를 차착(差錯) 없이 발견하나 그는 이를 이해하고 동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제압하고 시정하기를 꺼리지 않습니다. 그는 또한 만유의 주에게 극히 열성적이나 그 열성은 지식에 의해 선도되고, 사상과 말과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에 의해 지도 받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 생활의 유익을 위하여 품부(稟賦)하신 여러 가지 욕정들을 애써 소멸시키려 하지 않고, 이것들을 잘 통어(統御)함과 동시에 이것들을 선한 목적을 위하여 선용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록 격렬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감정일지라도 고상한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이를 사용하며, 증오나, 분노나, 공포의 정서도 이것들을 죄를 대항하는 데 쓰고, 신앙과 사랑에 의해 규제합니다. 그리하면 이것들은 영혼의 성벽이 되어 악한 자가 감히 침범할 수 없을 것입니다.
6. 이 성스러운 온유의 덕은 우리에게 영원히 있을 덕이지만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단련을 통하여 날마다 더욱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인내가 필요하니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인 것입니다.(히 10:36) 우리에게는 또한 인종이 필요합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상황 아래서든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특히 악한 사람과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언제나 온정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악을 선으로 극복하기 보다는 극복을 당할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7. 온유의 덕은 옛날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바깥 행동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님은 온유의 덕이 다만 외적 행동에만 그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형제를 향하여 이유 없이 성내는 사람은 누구든지 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향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면 의회에 끌려가게 될 것이요, 또 형제더러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불붙는 게헨나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마 5:21-22)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온유의 덕이 우리 생활에서 어느 경지에 까지 미쳐야 될지를 알 수 있습니다.
8. 주님은 살인 문제에 있어서 이것이 외부의 행동으로 실행되지 않고 다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분노까지도, 비록 그것이 외적으로 거칠은 말이나 격분된 언사로 표시되지 않았을지라도 살인으로 간주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형제를 향하여 성내는 사람은 누구든지”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형제인 만큼 이 세상 어떤 사람에게나 사랑에 위배되는 심정으로 정당하고 충분한 이유 없이 악의를 품으면 하나님의 공정 무사한 재판을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어떤 이는 “이유 없이” 라는 어구가 없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고 생각할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피상적 사고방식입니다. 사람에게 분노함이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만한 정당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 것입니까?
그러나 분노가 정당화될 경우가 없지 않으니, 그것은 죄에 대한 분노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분노하여도 이것이 죄는 아닙니다. 우리 주님도 이런 분노는 가지신 적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3장 5절을 보면 “예수께서 노하여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고”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죄인들에 대하여 걱정하시는 동시에 죄에 대하여는 분노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 조금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9. “형제더러 바보(라가)라고 말하는 사람은”(마 5:22) - 이것은 즉 “누구나 분노하여 모욕적인 언사를 발하는 사람은” 이라는 뜻입니다. 주석가들은 “라가” 라는 말은 수리아 말인데 공허하다, 무익하다, 미련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쓸 수 있는 비교적 경미한 욕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말이라도 쓰는 사람은 의회에 끌려가게 될 것이요, 세상의 재판자이신 하나님의 엄정한 판결을 받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모든 일이 다 극형에 해당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0. 우리는 흔히 우리가 수행할 어떤 의무나 책임을 완수만 하면 혹 다른 면에 있어서 좀 부족할지라도 이를 눈감아 주실 것이라는 망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런 망상을 떨쳐버릴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한 가지 의무를 수행했다면 다른 것은 못했어도 관계가 없다든지 한두 가지를 이행했으면, 그 전체를 이행한 것이나 다름없이 여기신다든지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할 일을 다 했다고 해서 우리 이웃에게 할 것은 안 해도 괜찮다고 할 수 없다고 주님은 우리에게 경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가령 종교적 행사를 완수했다 하더라도 우리 이웃에게 해야 할 선행을 무시했다면 하나님은 이를 용서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종교적 행사도 도리어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 할 때에 형제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은 것이 생각나거든…” 즉 그대가 형제에게 “라가” 라든가 “미련한 놈” 이라 했다든가 불친절한 언동을 했을 경우에 이로 인하여 그대의 양심이 거리낌이 되는 한, 그대의 드리는 제물이 그대의 죄과를 속량하여 주거나 또는 하나님 앞에 받으심이 되리라고 오산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나가서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 그리고 와서 제물을 드리라”(마 5:23, 24) 하셨습니다.
11. 이것은 그대의 영혼에 관계되는 일인 만큼 지체하지 말 것입니다.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 길에서 얼른 … 화해하라” 그가 어디로 가기 전에 화해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장에게 또는 재판장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에게,” 넘겨주고 재판장은 형리에게 혹은 하나님의 진노의 실행자인 사탄에게 내어주어 네가 감옥 또는 끝날 대심판을 위해 준비해 두신 지옥에 던져짐이 될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마지막 한 코드란트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이 수행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신에게는 이를 지불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만일 일단 옥에 들어가게 된다면, 당신의 고난의 독한 연기는 영원히 타오를 것임을 명심할 것입니다.
12. “온유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야말로 인간적인 견지에서 볼 때 지극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지혜자는 거듭 경고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나갈 때 우리에게 향한 푸대접에 대하여 항거하지 아니하고 저들의 이용물만 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며, 매일 매일의 생활필수품조차도 얻지 못할 것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던 소유물까지도 보존하지 못할 것이며, 평화롭고도 안전한 생활이나, 더구나 생을 즐긴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안 계셔서 그의 자녀들에게 관심을 가지시지 않는다면 그들의 말은 사실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계셔서 심판석에 좌정하시어 세상을 심판하시며, 온유한 자들을 도우시며, 인간의 지혜자들에 대하여 냉소하시고 견책하시는 동시에, 그들의 잔인성도 그것이 도리어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으로 변모하게 하십니다. 그는 온유한 자들에게 그들의 생활과 경건에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히 조달하시고, 인간의 폭력과 거짓과 악의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켜주시며 이를 즐기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소간 그들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내로서 자신들의 영혼을 보존함과 같이 하나님의 모든 선물도 향유하고 유지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가진 것에 대하여 항상 자족하며 하나님과 함께 이를 즐깁니다. 요컨대 그들의 마음과 욕망과 그들의 기쁨이 하늘에 있는 만큼 그들이야말로 참된 의미에서 “땅을 차지한” 다고 볼 것입니다.
13. “땅을 얻을 것이다” 라는 어구에는 더 깊은 뜻이 있으니 여기에는 그들이 장차 “의가 거하는 새 땅”에서 더 높은 자리, 즉 사도 요한이 계시록 20장에 서술한 기업의 계승도 포함됩니다. 여기에 대하여 요한은 아래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또 한 천사가 …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늙은 뱀 곧 악마요 사탄인 그 용을 잡아 천년 동안 결박하여 천년이 끝나기까지는 나라들을 미혹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 나는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과, 짐승이나 그 우상에게 예배하지 않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짐승의 낙인을 받지 않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 노릇했습니다.”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복이 있고 거룩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둘째 사망이 아무 세력을 부리지 못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 되어 천년 동안 그와 함께 왕 노릇할 것입니다.
[연습문제]
1. 기독교적 온유란?
1) 그리스도인의 온유가 아닌 것은?
2) 그리스도인의 온유란?
2.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는 것은?
3. “땅을 얻을 것” 이란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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