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9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2월 떠돌이 독립운동가 현순 목사 성경봉독 : 이사야 1:2~9 요절 :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이사야 1:6) 01. 서론 현순 목사는 부흥운동가로 이름을 떨치며 사람들이 현실의 고통스러운 생활을 잊고 장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한 인물이었습니다. 동시에 해외에 파견되어 나라를 찾기 위한 독립운동에 크게 공헌한 인물입니다.(중국에서는 ‘송원상’이란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 동안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자신이 떠돌이의 삶을 살았기에 나라를 잃고 세계 곳곳을 떠도는 이 땅의 사람들을 위로하며 하늘의 희망을 갖고 살아가도록 이끈 목회자였습니다. 02. 본론 현순 목사는 경기도 양주의 역관 가문에서 1878년 태어났습니다. 그는 1896년 단발령에 따라 아버지와 함께 상투를 잘랐고, 1897년 관립 영어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습니다. 한편 주일이면 배재학당에 가서 서재필의 강연을 들으면서 세계 정세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1899년 3월에는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간다의 순천중학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1901년부터는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1902년 귀국하여 ‘동서개발회사’에 취직하여 하와이 이민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고, 1903년 7월 이민단의 통역관으로 미국 하와이에 가게 되었습니다. 하와이에서 그는 동포들의 고달픈 처지를 돌보며 안정수•임치정•홍승하 등과 함께 “복음의 진리 대도를 전파하며” 호놀루루에 한인감리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1905년에 열린 연례회에서 가와이섬으로 파송받아 본격적인 목회에 나서면서 지방회의 교역자 교육반에서 목사 과정을 마쳤습니다. 1907년 귀국하여 1908년 3월부터 배재학당에서 영어, 수학 등을 가르치는 한편 미감리회 조선선교연회에 정식으로 입회하여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정동제일교회 부목사로 시무하면서 교회 부흥을 이끌었습니다. 1909년 서울 서부지역을 담당하는 전도목사가 되었고 1911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1회)하였습니다. 그후 전덕기 목사가 담임하던 상동교회 부목사로 일하다가 한국감리교회 주일학교 총장(총무)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현순 목사는 1914년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심령상 권능이 충족하지 못한 것”을 깨달아 매일 새벽 김종우 전도사와 함께 남산에 올라가 4개월 동안 계속 기도하면서 성령의 도움을 간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1914년 11월 “성신의 감동을 받아 전신이 떨다가 넘어지면서 기이한 묵시의 말을 하는” 성령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하나님께서 전도하는 능력까지 은사하신 고로” 본격적인 부흥사로 활동하게 됩니다. 1915년 다시 감리교회주일학교연합회 간사로 파송받아 상해로 망명하기까지 전국을 돌며 각 교회에 주일학교를 세웠을 뿐 아니라 부흥회도 열었습니다. 그의 설교로 많은 사람들은 현실의 고통스러운 생활을 잊고 장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현순 목사는 3.1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비록 민족대표 33인에 들지는 않았으나 3.1운동의 전개 상황을 외국에 알리는 일과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가 3.1운동에 처음 참여한 것은 <기독신보> 사장 김필수 목사의 안내로 1919년 2월 18일 오후 이갑성의 집에서 이갑성•안세환•오상근•함태영 등과 모임을 가지면서부터였습니다. 다음 날 다시 이갑성의 집에서 열린 모임에서는 3.1운동의 방법론에 관한 것과 서명할 대표자를 포섭하는 것에 관한 논의를 하였습니다. 20일 밤에는 전날 만나던 인사들과 상의하여 각자가 맡을 업무를 나누었습니다. 영어를 잘하는 그에게는 상해에 가서 국내의 운동을 외국에 알리고, 열강에 독립을 승인하여 줄 문서를 발송할 것 등의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현순 목사는 2월 24일 용산역에서 가족과 박희도의 전송을 받으면서 서울을 출발하였고, 신의주•봉천•천진을 거쳐 3월 1일 상해에 도착하였습니다. 그후 망명인사들과 협의하여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총무의 직임을 맡아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우선 국내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을 영문 전보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과 미국•연해주의 국민회에 전달했습니다. 이어서 이광수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영문 신문사에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3.1운동 직후 국내를 탈출하여 상해로 몰려드는 민족 운동가들을 규합하여 임시정부 수립하는 일에 주동인물로 활약하기 시작했습니다. 3월 하순경부터 임시정부 조직에 착수하여 4월 10일 제1차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였고 여기에서 그는 외무차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4월 23일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임시정부 조직에서는 평정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4월 23일 열린 제2차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외무부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임시의정원법 심사의원으로 선임되어 임시의정원법 제정에 참여하였습니다. 8월 5일 의원제가 폐지되고 차장제가 도입되면서 그는 내무차장에 임명되어 임시정부 수립의 실질적인 책임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상해 외에 러시아에도 이동휘가 이끄는 또 다른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는데 그의 노력으로 두 임시정부가 합해져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역사적인 업적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만주•러시아를 수차 왕래하며 흩어져 있던 민족운동 단체를 하나의 힘으로 규합하는 노력을 하였으며 ‘대한적십자회’ 창설에도 도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920년 6월 그는 프랑스를 거쳐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고, 9월부터 김규식의 뒤를 이어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임시정부 외교 활동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임시정부에서 운동노선의 차이로 파벌싸움이 계속되었고 독립운동의 효과적인 추진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는 1922년 7월 ‘시사책진회’를 조직, 흩어진 독립운동 세력을 규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계속 분열과 갈등이 깊어갔습니다. 이처럼 활동이 여의치 않자 현순 목사는 하와이에 머물면서 한인교회 목회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1924년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한인감리교회를 담임하였으며 1926년 카와이섬의 리휘교회를 담임하면서 1940년 은퇴할 때까지 교민들을 지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독립운동을 위한 그의 노력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와이 각처를 돌아다니며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면서 모금운동도 벌여 이를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일을 거르지 않았습니다. 은퇴 이후에도 미국에 거주하다가 1968년 8월 11일 “죽기 전에 꼭 통일된 내 나라를 찾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안은 채 로스앤젤레스 인근의 한 양로원에서 별세하였습니다. 그의 유해는 1975년 8월 8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치되었습니다. 3.1운동 직전에 중국 상해로 망명한 후 조국 독립을 위하여 세계를 한 바퀴 돌며 분투했던 현순 목사는 해방이 된 지 30년이 지나서야 해외 애국선열 유해 봉환식을 거쳐 비로소 조국의 땅에서 잠들 수 있었습니다. 03. 결론 현순 목사는 3.1운동의 숨은 주역으로 역할한 인물입니다. 비록 민족대표 33인에 들지는 않았으나 3.1운동의 상황과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온 세계에 알리면서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활약했습니다. 그 후에는 다시 목회에 복귀하여 해외에서 떠돌이의 삶을 살아가는 교민을 위로하며 희망을 갖도록 헌신했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그동안 묻혀 있던 현순 목사의 자취가 드러나고 새롭게 조명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기독교 신앙과 사회정치적 이념은 어떤 관련성이 있는 것인지를 논의해봅시다. 2.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를 이야기해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19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3.1 운동을 이끈 자랑스러운 감리교인 저자 조이제 목사 충청연회 서산동지방 한샘교회 담임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위원회 위원(2000~2002)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운영위원 역임 제31회 총회 역사보존위원회 위원 주요저서 한국감리교청년회 100년사 한국교회 인권운동 30년사 공덕교회 100년사 청파교회 100년사 한국감리교 인물사전(공저) 한국 기독교의 역사(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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