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평신도 월례회공과 11월 독립운동에 나선 조용한 목회자 현석칠 목사

나효선 2019. 11. 23. 20:00

 

기독교대한감리회 2019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1월 독립운동에 나선 조용한 목회자 현석칠 목사

 

성경봉독 : 호세아 10:12~15

요절 :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나타 내리시리라

        (호세아 10:12)

      

현석칠 목사 사진출처 : 강형구 http://cafe.daum.net/roknavy38

          

                   

01. 서론

 

현석칠 목사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목회한 인물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목회자입니다. 그는 해주, 평양, 공주 등의 지역에서 기도와 성경 중심의 신앙 생활을 강조하면서 교인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행동을 이끌어내는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에서도 뚜렷한 행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공주 지역의 3.1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였고, 한성임시정부 수립에도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02. 본론

 

현석칠 목사는 1880년 평남 용강에서 태어났습니다. 선비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사서삼경에 능통하였으나, 어느 날 낯선 전도인이 전해 준 성경을 받아 읽으면서 진리를 깨닫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1905년부터는 대영성서공회의 지원을 받는 매서인이 되어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성경책을 팔면서 전도하였습니다.

 

1909년에 해주읍교회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하였고 1911년에는 동대문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전신)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최병헌전덕기정춘수 등과 함께 1911년 제1회로 졸업하였습니다. 1912310일의 연회에서 집사 목사 안수를 받고 북한 지역의 중심 교회인 평양 남산현교회로 파송받아 말씀과 기도를 중심으로 목회하였습니다. 19178월부터는 공주읍교회(현재의 공주제일교회)를 담임하는 한편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에 미감리회 대표로 참여하였습니다.

 

1919년에는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나고 전국으로 확산되자 현석칠 목사는 공주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 일을 추진하였습니다. 공주읍 만세시위는 324일 저녁 영명학교에서 현석칠 목사와 천안읍교회 안창호 목사, 공주읍교회 교인이면서 영명학교와 영명여학교와 관련된 인물들인 김관희현언동이규상김사현오익표안성호 등이 모여 조선 각지에서 일고 있는 조선독립 시위운동에 공명하여 공주에서도 41일 하오 장이 서는 날을 틈타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협의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날 모임에서는 공주읍 만세 시위의 구체적인 날짜와 방법을 정한 후 영명학교 교사 김관희 선생을 실질적인 주모자로 선정하였습니다. 김관희 선생은 같은 학교의 김수철 선생에게 이를 알리면서 학생 동원과 선언문 인쇄, 태극기 제작을 논의하였습니다.

 

김수철 선생은 330일 자신의 집에서 영명학교 학생 노명우강윤유준석 등과 구체적인 공주 만세시위의 내용을 협의하였고, 시위 전 날에는 전달된 독립선언서를 기초로 조선 독립을 고취하는 유인물 1천 매를 영명학교 기숙사에서 인쇄하였습니다. 시위 때 사용할 태극기는 영명여학교 졸업생 박루이사이활란김현경 등이 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거친 후 41일 오후 2, 김수철 선생이 이끄는 영명학교 학생 지도부는 공주읍 장터로 나가 시위를 이끌었습니다. 이 시위는 기대한 만큼의 호응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이후 천안병천 등 인근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현장에서 시위 주모자들은 체포되었고, 이후 현석칠 목사를 비롯한 배후 인물들도 체포되었습니다. 현석칠 목사는 영향력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였기에 그의 혐의를 입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191982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났습니다.

 

한편 현석칠 목사는 3.1운동 이후의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한성임시정부수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이규갑이 주도적으로 활동한 한성임시정부를 조직하는 일에 관여하였습니다. 한성임시정부는 전국 각처에서 시위 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나 단일 지도부의 지휘 없이 각자 생각대로 전개하고 있기에 국민대회를 열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체계적인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조직입니다. 그는 4월초 무렵부터 이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이후 기독교측 대표로 선임되어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 일을 위해 기독교측에 배당된 거사자금 600원을 내놓았고, ‘임시정부선포문’, ‘임시정부령을 비롯한 취지문결의문약법 등을 작성하고 이규갑 등과 인쇄작업을 직접 감당하였습니다. 423일 거사 당일, 학생 시위대가 자동차를 타고 서울 시가를 돌며 유인물을 뿌렸고, 종로 보신각 앞에서 깃발을 흔들며 만세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전국 대표들의 불참으로 국민대회는 열리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한성임시정부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연결짓는 고리 역할을 했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처럼 현석칠 목사는 19193월과 4월에 진행된 공주읍 만세운동과 한성임시정부 수립운동에 모두 참여하여 민족운동의 중심부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19199월에 열린 연회에서 평양 남산현교회로 다시 파송되어 다른 어느 곳보다 많은 피해를 입은 남산현교회와 평양 지역을 회복시키는 일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19203월 초 그의 남산현교회 목회 활동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철원 애국단 사건으로 추정되는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몇 달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옥 후 영변읍교회, 강서교회를 거쳐 19219월 수원지방 감리사로 파송되어 지역 내의 30여 교회를 순방하며 관리할 뿐 아니라 독립운동 희생자 유가족들을 돌보는 일에도 앞장섰습니다. 계속해서 영변지방, 신창지방 감리사로 활동하다가 19335월 평양 유정교회로 파송되어 시무하다가 19354월 자원 은퇴하고 한 때 평양에서 여관을 경영하였습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만주로 건너가 하얼빈에서 동아일보 지국장을 역임하였습니다.

 

1938년에는 사평가교회를 담임하게 되면서 목회 일선에 복귀하였습니다. 그러나 1941년 친일 어용교단인 만주기독교회가 출범하는 것을 계기로 목회에서 은퇴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평가를 떠나 용정으로 거처를 옮겨 동북교회를 후원하던 중 중풍으로 쓰러져 수개월 동안 투병하다가 1943923일 별세하였습니다. 그의 유해는 용정 교외 기독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1945년 그의 묘소 바로 옆에 일본에서 옥사한 민족저항시인 윤동주의 유해가 묻혔습니다.) 그의 묘비는 무너진 상태로 방치되다가 2003년 발견되었고 그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2004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고, 그의 유해는 200510월 국립 대전현충원으로 옮겨져 안장되었습니다.

 

 

03. 결론

 

현석칠 목사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의 감리교를 대표하는 목회자입니다. 그는 자기를 낮추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 남을 먼저 배려하고 내세우는 생활을 실천하였고 교회를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면서 동시에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한 인물입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우리 교회의 역사에서 잊혀진 인물들을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일을 시작 해봅시다.

 

2. 전적인 헌신과 이름을 드러내는 일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이야기해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19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3.1 운동을 이끈 자랑스러운 감리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