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9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8월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성경봉독 : 사사기 5:2~12 요절 :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 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사사기 5:12) 01. 서론 유관순은 3.1운동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3.1운동의 상징으로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는 독립운동가입니다. 유관순은 여성, 그것도 어린 학생의 신분임에도 겨레의 과제를 온 몸으로 떠안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끝까지 자신을 희생하는 불꽃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유관순은 기독교 신앙에 입각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옥중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민족독립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02. 본론 유관순은 1902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유중권은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받아들인 후 향리에 흥호학교를 설립하고 운영에도 관여하던 인물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여 매봉교회에 출석하면서 구국의 방법과 신념이 기독교에 있음을 자각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계몽에 헌신하였습니다. 유관순은 바로 이러한 가정적인 배경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성격이 활달하고 의협심이 강해서 매사에 적극적인 태도를 지녔다고 합니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신앙이 든든한 소녀” 유관순은 어느 날 당시 지역의 순회선교사였던 샤프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샤프는 유관순을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여 교비생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습니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에 다니던 시기에 두 사람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는데 한 사람은 정동제일교회의 손정도 목사였고, 또 한 사람은 이화학당의 박인덕 선생이었습니다. 그녀는 주일이면 정동제일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당시 정동제일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손정도 목사의 설교를 통해 유관순은 하나님 사랑이 나라 사랑의 근간을 이루는 것임을 배우게 되어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길렀습니다. 박인덕 선생으로부터는 신앙의 에너지를 나라 사랑의 실천으로 승화시켜야 함을 배웠습니다. 이들에게 영향을 받은 유관순은 성경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애를 썼고, 새벽이면 채플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유관순은 고등과 2학년 때 3.1운동을 맞이하였습니다. 당시 이화학당 내에는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학생 단체인 ‘이문회’가 있었는데 유관순은 이 회의 임원이었습니다. 회원들은 학생 동원을 책임진 YMCA 박희도의 요청에 따라 3월 1일을 기해 대한문 앞에 나가 망곡을 하고 만세 대열에 합류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 이런 기미를 알아 챈 프라이 당장과 서양인 교사들이 문을 잠그고 학생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만류했지만 유관순은 동료들과 기숙사 뒷담을 넘어 탑골공원으로 달려가 만세시위를 벌였습니다. 3월 5일에 열린 서울지역학생연합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만세를 불렀습니다. 이처럼 학생들의 시위가 확산되자 총독부는 서울의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습니다. 학교가 문을 닫자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고향은 아직 3.1운동의 열기가 전해지지 않아 조용했습니다. 유관순은 서울의 소식을 전하면서 매봉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는 본격적인 만세시위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우선 매봉교회당에 모여 서울의 만세운동을 자세히 설명하고 병천 지역에서도 궐기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제안에 동네 유지들이 찬동하여 병천운동을 기획하고 구체적인 방침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만세시위 일자는 4월 1일(음력 3월 1일) 병천(아오내) 장날로 정했습니다. 인근 각 고을의 뜻을 모으는 연락 및 조직 사업은 만세시위에서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기에 유관순은 그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녀는 이후 20여 일 동안 천안•청주•연기•진천 일대의 교회를 찾아다니면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할 것을 설득하는 데 온 힘을 다 쏟았습니다. 어린 소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독립을 향한 열정으로 극복해내었습니다. 시위 전날 유관순은 매봉 꼭대기에 올라가서 봉화를 올렸습니다. 이 봉화는 각 고을의 독립에 대한 열기를 이끌어냈습니다. 드디어 4월 1일 천안•안성•진천•청주•연기•목천 등 여섯 고을에서 모여든 3천여 명이 병천 장터에서 만세세위를 벌였습니다. 오후 1시경 조인원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유관순의 독립 연설이 있은 뒤 ‘대한독립’이라 쓴 깃발과 태극기를 들고 시위행진에 들어갔습니다. 이 시위를 일제의 헌병대가 막아섰고 해산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래도 만세시위 대열이 해산하지 않자 총격을 가했습니다. 이 현장에서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살당하는 등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오후 4시경 다시 모인 시위대는 일제의 폭압적인 진압에 격분하여 순국자의 시신을 주재소로 옮겨놓고 일제에 항의하였습니다. 이때 유관순은 “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면서 주재소장을 잡아 나꿔채며 격렬하게 항의하였습니다. 또 시위대는 면사무소•우편소를 점거하고 만세시위의 타당성을 천명하였습니다. 이날의 병천 만세운동은 호서지방을 대표하는 3.1운동이자 충청남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한 운동이었습니다. 전국적으로도 가장 격렬한 만세시위 운동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유관순도 그날 체포되어 머리채를 잡힌 채 온갖 치욕을 다 당한 후 천안헌병대에 구금되었고 다시 공주 법원검사국으로 넘겨졌습니다. 이곳에서 공주 영명학교 대표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잡혀온 오빠 유관옥을 만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소식을 전하며 서로를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1919년 5월 9일에 열린 초심에서 유관순은 7년 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그러나 유관순은 재판 도중 재판장에게 “남의 나라를 침략한 당신네들이 내게 무슨 죄를 줄 권리가 있단 말이오. 나는 잃어버린 내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하여 투쟁한 당당한 애국 소녀요”라고 항의하며 재판의 부당함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3년형을 받았지만 이에 불복하여 항고하였습니다. 1919년 6월 30일에 열린 경성복심법원 상고심에서 유관순은 일제의 부당한 재판을 받을 수 없음을 항변하면서 재판장에게 의자를 집어던지는 등의 저항을 하였습니다. 결국 3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감옥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서대문감옥에서는 이화학당 스승 박인덕을 만나 의기투합하였습니다.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쳤다”는 유순관의 결연한 말에 박인덕은 “우리에게 능력과 힘을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싸우자”고 격려하였습니다. 이후 옥중 투쟁을 시작하여 옥중에서 매일 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이로 인해 간수들에게 갖은 폭행을 당하였고, 심지어 그녀의 밥에 쇳가루와 모래가 섞여 배급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1920년 3월 1일에는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 옥중 만세시위를 어윤희 등과 함께 벌였습니다. 이 만세운동에 절도•강도•파렴치범•사기범 등으로 수감되어 있던 이들까지 합세하여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심한 매질과 고문을 당하여 방광이 터졌고,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1920년 9월 28일 옥중에서 19세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03. 결론 유관순은 민족의 수난을 가져온 일제에 온 몸으로 저항한 인물입니다. 여학생이란 당시의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만세시위를 준비하였고, 앞장서서 시위대열을 이끄는 지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갇힌 상태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민족의 과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녀는 민족 독립의 불꽃이 되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유관순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를 기념하는 장소와 기념물을 찾아가 봅시다. 2. 교회 혹은 선교회에서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사람들을 기릴 수 있는 방법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이야기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19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3.1 운동을 이끈 자랑스러운 감리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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