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평신도 월례회공과 7월 민족과 함께 고난당한 목회자 오화영 목사

나효선 2019. 7. 23. 00:38

기독교대한감리회 2019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7월 민족과 함께 고난당한 목회자 오화영 목사

 

성경봉독 : 출애굽기 32:30~36

요절 :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출애굽기 32:32)

  

   

01. 서론

 

오화영 목사는 종교교회를 담임한 남감리회를 대표하는 목회자였습니다. 그의 설교는 매우 신령하여 각 사람이 마음을 살피고 분발케 하는 힘이 있었으며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명 연설가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조선은 조선 사람의 조선이 될 줄로만 믿는민족의식을 지닌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이같은 그의 민족의식을 결국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그는 남감리회의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역할했습니다.

 

 

02. 본론

 

오화영 목사는 1879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한때 동학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귀국 후 전도를 받고 1906년 개성북부교회의 크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1909년부터 남감리회에 소속되어 목회생활을 시작하여 개성서구역, 개성북부교회를 거쳐 19139월 원산 상리교회로 전임하였습니다. 원산에서는 여성 스스로의 회를 조직하도록 제안하여 원산 여선교회가 발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14823일 김영학최태곤 등과 함께 앳킨스 감독에게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는 한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풍의 목회자면서도 신앙의 열정을 갖고 있어 부흥사로도 활약하였습니다.

 

19179월부터는 서울 종교교회로 파송받아 활동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부담임목사로 저다인 목사를 돕는 역할을 하였지만 이듬해 연회에서 담임목사로 파송받아 종교교회의 내실화에 힘을 썼습니다.

 

1919년에는 3.1운동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습니다. 한일합병 이후 일본의 통치에 심한 고통을 느끼고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그는 민족자결주의에 관한 보도를 접하면서 민족 독립을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후 216일 저녁예배 후 설교를 맡았던 정춘수 목사와 독립운동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것으로 3.1운동 참여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 뜻에는 공감하였지만 당시에는 참여 여부를 결정을 하지 못하다가 220일 박희도 전도사와 이승훈 장로 등을 만나 논의하면서 조선의 일은 조선 사람이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여이 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남감리회를 대표하는 인사로서 누구보다 더 적극적으로 3.1운동의 성공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우선 남감리회 소속의 수표교교회 신석구 목사를 만나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고, 221일에는 기독교 대표자 모임에 참석하여 운동방향과 내용에 대해 의견을 나눴습니다. 222일에는 개성으로 내려가 김지환 전도사의 주선으로 개성 지역 교계 지도자들을 만나 개성 독립운동에 대해 논의한 후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226일에는 기독교 대표자 모임에 참석하였고, 228일 밤에는 손병희의 집에서 민족대표자 전체 모임에 참석하여 31일의 거사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 그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을 뿐 아니라 독립선언서를 개성과 원산에 보내 그곳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도록 지원했습니다.

 

31일에는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였다가 연행되었습니다. 이후 다른 민족대표들과 같은 과정과 내용으로 조사와 재판을 받았습니다. 314일 구속 기소되면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고 이곳에서 18개월 동안 미결수 신분으로 예심 재판을 받았습니다. 예심을 마친 후에는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 혐의로 정식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그는 922일에 열린 공판에서 “4천 년 역사를 지닌 조국을 잃어버린 망국의 민족으로서 어찌 운동에 반대하겠는가? 우리 조선은 결코 다른 나라에 부속되지 않을 것을 믿는다고 항변하면서 조선은 조선 사람의 조선이 될 줄로만 믿는다고 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태도는 두려워하거나 후회하는 모습이 아니라 더욱 강해진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오화영 목사의 모습을 <기독신보> (1920.10.27.)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습니다.

 

감리교 목사로 합병을 반대하고 독립을 희망하는가 하는 심문에 피고는 렬렬한 태도로 사천 년 역사를 가진 조선을 일조에 일본에게 빼았기었던 것을 반대하는 회포와 독립하고자 하는 희망이야 어찌 다 말하리오. 그러나 다만 시간 문제이나 언제나 어느 때던지 조선은 반드시 우리의 조선이 될 줄 알고 오늘날 이 자리에서 이러한 수치를 당하면서도 생명을 보존하여 익어가는 조선 독립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정춘수에게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이에 참가한 것이라 진술하고 기외에 선언서 배포에 대한 세밀한 심문이 있었고

 

당당하게 재판에 임한 오화영 목사는 19201030일의 결심공판에서 징역 26월을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경성감옥으로 옮겨져 외롭고 괴로운 철장 아래서도 오히려 기쁨과 즐거움으로 긴 세월을 하루같이 지내면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255일 만기 출옥하였습니다.(미결수로 복역한 기간까지 합치면 32개월의 옥고를 겪었습니다.)

 

오화영 목사는 출옥하자마자 당시 담임목사가 비어 있는 수표교교회로 가서 3개월 동안 강단을 지키면서 목회 일선에 복귀하였습니다. 19229월 연회에서 다시 종교교회로 파송되었고, 이후 개성 북부교회, 수표교교회에서 목회하였습니다. 1928년에는 목회 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사회 활동에 직접 나서 경성기독교중앙청년회(YMCA)의 종교부 간사로 활동하였고, 1929년 광주학생만세 사건의 대책을 논의하던 중 체포되어 6개월 동안 두 번째 옥고를 치렀습니다.

 

1931년 다시 목회 활동에 복귀하여 수표교교회, 상동교회, 연화봉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9374월 중부연회에서 은퇴하였습니다. 이후 농업에 종사하다가 1939년 항일비밀결사 조직인 흥업구락부사건에 관련되어 6개월 동안 세 번째 옥고를 겪었습니다. 그후 그는 해방 이전까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가 8.15해방과 함께 정계에 투신하였습니다. 그해 8월 건국 준비위원에 피택되었고 조선민족당을 결성하여 당수로 선출되어 활발한 정치 활동을 했습니다. 1950530일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서울 종로을구)에 당선되어 활동하다가 6.25전쟁으로 공산군에게 납북된 후 196092일 병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03. 결론

 

오화영 목사는 한국 교계를 대표하는 부흥사였으나 민족의 수난을 외면하지 않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목회자입니다. 결국 그 자신도 민족의 수난 시기에 세 번이나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첫 감옥 생활은 1910년대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한 것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1920년대 광주학생 만세사건에 관한 대책을 세우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1930년대 흥업구락부에 관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민족의 수난을 외면하지 않고 이를 극복하려는 그의 노력은 어떤 특정한 시기와 상황 속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평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계속되는 고난에도 나라의 일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 오는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2.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겪게 되는 고난의 상황을 신앙적으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19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3.1 운동을 이끈 자랑스러운 감리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