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9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6월 민족의 어머니 어윤희 장로
성경봉독 : 요한계시록 2:8~11
요절 :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요한계시록 2:10)
01. 서론
어윤희 장로는 곳곳으로 떠돌아야 했던 기구한 삶 속에서도 아름다운 흔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였고,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한 그녀의 삶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식민지 한국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이 감당해야 할 주님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일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수행하며 민족의 어머니로 살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의지할 데 없는 버려진 고아들을 친어머니처럼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30여 년 동안을 고아의 어머니로 살았습니다.
02. 본론
어윤희 장로는 충북 충주의 산골에서 1878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이 선비 가문이었기에 어린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언충신 행독경’(言忠信 行篤敬, 말은 충성되고 미쁘게 하며 행실은 착실하고 남을 공경하라)이란 글귀를 강조하였기에 이 가르침을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12세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16세에는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결혼한 지 2개월 만에 동학군이 되어 집을 나갔고, 곧이어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청상과부가 되어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와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지만 몇 년 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어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고향을 떠나 황해도 평산•해주 등지를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그 후 어윤희 장로는 경기도 개성에 정착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나이 30세가 되던 해 우연히 개성북부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가 정춘수 전도사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하였고 얼마 후 갬블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그녀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갬블의 추천으로 주로 과부나 기생, 기혼여성들이 다니던 미리흠여학교에 입학하여 정규 교육을 받았습니다.
졸업 후인 1915년부터 어윤희 장로는 전도부인이 되어 교회 봉사와 전도 사업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녀는 개성과 토산 지역에 파송되어 주로 농어촌, 산간벽지의 교회들을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벌였습니다.
어윤희 장로는 개성에 있는 여자성경학원 사감으로 근직하고 있을 때 3.1운동을 겪게 되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정춘수 목사가 개성북부교회의 강조원 목사에게 독립선언서 수백 장을 전달하고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부탁하였으나 소심한 성격의 강조원 목사는 이를 직접 처리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 교회 유치원 교사로 있던 권애라에게 전달했으며, 권애라는 다시 호수돈여학교 상급생인 최옥순에게, 최옥순은 어윤희 장로에게 선언서를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어윤희 장로는 3.1운동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서울에서 진행되는 독립선언식과 만세운동 계획을 전달받은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이 어윤희 장로를 찾아와 개성 만세시위를 논의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어윤희 장로를 중심으로 개성의 만세시위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독립선언서를 시내에 배포하는 일과 교인들을 개성만세시위에 참석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일이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뜻인지를 알기 위해 밤을 세워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확신을 얻었고, 이후 적극적으로 3.1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개성의 만세시위는 3월 3일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이 시내로 몰려나오는 것을 신호로 시작되었습니다. 어윤희 장로는 시위대 제일 앞에서 연설을 하고 만세를 부르며 군중을 이끌었습니다. 그날 저녁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체포하러 온 형사에게 “당신들이 내 몸을 묶어갈망정 내 마음은 못 묶어 가리라” 하며 순순히 따라갔습니다. 그 후 경찰과 검사국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음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행동했습니다. 경찰서에서 배후관계의 조사를 받을 때에는 “새벽이 되면 누가 시켜서 닭이 웁디까? 우리는 독립할 때가 왔으니까 궐기하는 것이지요”하고 차갑게 쏘아 붙였습니다. 검찰 조사에서도 그녀의 당당함은 계속되었습니다. 심지어 “옷을 발가벗기라”고 호통 치는 검사에게 스스로 옷을 벗고서 “자, 실컷 보시오. 당신 어머니도 나 같을 게고, 당신 부인도 나 같을 거요” 하고 소리를 질러 검사를 당황하게 한 적도 있었습니다. 재판에서 1년 6개월 징역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 즉 유관순과 같은 방에 수감되었습니다. 감옥 안에서도 그녀의 투쟁은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 유관순과 함께 옥중 만세시위를 벌인 것은 그의 불굴의 의지를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만기 출옥한 후에도 나라의 독립에 대한 헌신을 계속하여 자신의 집을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나 연락처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이 일로 여러 차례 곤욕을 치렀으면서도 두려움 없이 그 일을 계속하였습니다.(이러한 업적이 인정되어 1995년에 독립유공자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여성을 향한 민중계몽과 교육 활동에도 영향력을 발휘하여 오늘의 감리교 여선교회가 형성되는 바탕을 마련했습니다.
1937년에 어윤희 장로는 개성 유지의 도움을 얻어 고려정에 ‘유린보육원’이란 고아원을 설립하고 30여 명의 영아를 보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버려진 고아들의 어머니이자 할머니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해방 후인 1949년에는 월남하여 서울 마포의 서강에 유린보육원을 재건하여 죽는 날까지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유린보육원은 서강교회와 관련을 맺으면서 운영되었고, 그 자신도 서강교회에 출석하며 1952년 장로로 피택되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헌신적으로 고독한 어린 아이들을 돌보다가 1961년 11월 18일 84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별세 후 생전에 측근들에게 일러둔 말씀을 지켜 장속을 열어보니 교회 헌금과 자신의 장례비 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마지막 떠나는 자리까지도 스스로 깨끗하게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감옥 생활을 할 때 만나 남매의 의를 맺은 의료선교사 스코필드의 표현대로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으로서의 삶이었습니다. 1953년 5월 사회사업가로 나이팅게일 기장을 받았고, 1959년에는 인권옹호 공로표창을 받았으며, 1961년에는 중앙여자고등학교로부터 ‘3.1운동선도자찬하’를 받았습니다. 별세한 다음 해인 1962년 3월 1일, 그의 삶을 기념하기 위해 유린보육원에서 성장한 이들과 개성 친지들이 힘을 모아 ‘장로 어윤희 여사 기념비’를 서강교회 앞마당에 세웠습니다.
03. 결론
어윤희 장로는 30세에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삶을 완전하게 바꾸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독실한 믿음과 고결한 인격을 지니게 되었고, 자신을 버리고 남을 자신의 몸 같이 사랑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위대하고 아름다운 사랑과 자아 희생의 정신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죽도록 충성하면서 뜨거운 열정을 갖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한 민족의 어머니였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자신이 겪은 고난과 고통의 경험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이야기해 봅시다.
2.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 교회와 우리 선교회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19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3.1 운동을 이끈 자랑스러운 감리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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