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9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3월 평양의 여성운동가 박현숙 장로
성경봉독 : 누가복음 12:22~34
요절 :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누가복음 12:32)
01. 서론
박현숙 장로는 평양의 신앙 가문에서 태어나 신앙으로 양육되었고, 신앙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한 인물입니다. 숭의여학교에 진학하여 황애덕 선생을 만나면서 그녀의 삶은 큰 전환의 계기를 맞았고, 이때부터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여러 차례 체포되어 투옥되는 등 큰 수난을 당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여 북한의 재건 사업에 힘을 보탰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월남하여 사회 사업에 헌신하면서 정치인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동시에 교회의 장로로서 교회를 발전시키는 일과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02. 본론
박현숙 장로는 1896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신실한 교인 어머니 최광명에게 이끌려 5세 때부터 남산현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고, 1907년 노블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감리교 학교인 정진소학교를 1912년 졸업한 후 서울의 이화학당에서 한 학기 동안 공부하다가 평양의 숭의여학교로 전학하였습니다. 숭의여학교에서 그녀는 ‘송죽회’에 가입한 것을 계기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송죽회는 1913년 숭의여학교 교사 김경희•황애덕이 주도하여 조직한 한국 최초의 여성 비밀결사 단체입니다. 송죽회 회원들은 ‘생일잔치’로 위장하고 매달 15일을 기해 모임을 갖고 회비를 모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해서 엿장수, 떡장수로 변장하고 거리에서 행상을 하기도 하였고, 자수 혹은 머리채를 잘라 팔기도 하였습니다.
1915년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후 박현숙 장로는 전주의 기전여학교 교사로 부임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을 따르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공주회’를 조직하고, 학생들에게 신앙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습니다. 1917년 4월 숭의여학교 교사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는 송죽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본격적으로 송죽회를 이끌며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이후 송죽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여성운동 세력은 평양 만세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평양 남산현교회의 신홍식 목사로부터 평양 만세운동에 참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에 이르렀고 이를 기꺼이 받아들인 송죽회 회원들은 태극기 제작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습니다. 3월 1일 남산현교회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진 후 시내로 진출하여 장대현교회에서 별도의 행사를 진행한 장로교인들과 합류하여 만세 시위를 벌였습니다. 박현숙 장로는 할머니 복장으로 변장하고 여성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신대한의 애국 청년 끓는 피가 뜨거워”로 시작되는 ‘혈성가’를 대담하게 불러 독립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그녀는 1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1919년 8월 하순 병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출옥 직후인 9월 같은 남산현교회의 교인이며 독립운동가인 김성업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려나가는 한편 평양 숭혜여학교 교감으로 취임하여 교육 사업에 종사하였습니다. 감리교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에도 계속 투신하여 대다수 남성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거나 망명 혹은 피신하여 생긴 독립운동의 공백기를 메우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평양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평양감리교 지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하다가 1920년 10월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1921년 3월 평양 복심법원에서 1년 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22년 5월 28일 가출옥하였습니다.
그후에는 평양 YWCA에 참여하여 문맹퇴치, 농촌사업 등을 통한 여성운동을 벌여나갔습니다. 미감리회 여선교회의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1928년에는 서기, 1929년에는 부회장, 1930년에는 회장으로 선임되어 감리교 여성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남북의 두 감리교가 합동한 후에는 평양 지방 총무로 활동하면서 전국 연합회의 부회장 직책까지 맡았습니다. 일제 말기인 1941년 2월에는 만국부인기도회가 문제가 되어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만국부인기도회는 현재도 실시되고 있는 ‘세계여성기도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세계의 기독교 여성들이 매년 2월말에서 3월초에 하루를 잡아 공동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는 행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선교사들이 주관하여 1930년대부터 실시되었습니다. 일제는 당시 사용한 기도문 중 ‘하나님 나라’, ‘평화’ 등과 같은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 때문에 이를 사건화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기도회 준비 작업을 주도하고 순서지를 전국 감리교회에 발송하는 책임을 맡았던 그녀는 또 다시 체포되어 1개월 가량 구금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건 이후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통제가 더욱 악랄해져 기독교인들이 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남편 김성업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1937년에 검거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여름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습니다.
해방 후 박현숙 장로는 조만식을 위시한 애국동지들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고 1946년 신탁통치안이 가결되자 조만식•이윤영•김병연 등과 함께 소련군사령관 스치코프를 방문하여 신탁통치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함을 보고 월남하여 서울에 ‘송죽원’이란 고아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1953년에는 숭의여학교를 서울에서 재건하고 이사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치인으로서의 길도 걸었습니다. 이승만과 함께하여 ‘민족통일본부’ 여자부장, 입법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52년 10월에는 무임소장관(정무제2장관)으로 입각하여 20개월 동안 활동하였습니다. 1958년에는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김화), 1963년에는 공화당 소속의 국회의원(전국구)으로 당선되었습니다. 1965년에는 국회에서 조찬기도회 개최를 주도하여 국가조찬기도회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 외에 전국 여성단체최고위원, 3.1여성동지회 회장, 서울적십자사 자문위원장, 대한부인회 부총재 등의 직책을 맡았습니다.
한편 1946년 10월부터는 평양에서 월남한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서울 남산교회에 출석하여 1980년의 마지막 날에 별세하기까지 장로의 직임을 다하였고, 1955년부터 1959년까지 두 기에 걸쳐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 전국연합회 회장으로 헌신하였습니다. 남산교회의 반포동 예배당을 건축할 때 건축위원회 명예회장으로서 물심양면으로 교회를 위하여 크게 기여하였고, 강원도 철원의 신흥교회(1967)와 서울 도봉구의 창현교회(현재의 갈릴리교회, 1968)를 개척하고 박현숙 장로 기념 예배당을 각각 봉헌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대통령 표창(1963), 건국포장(1980), 건국훈장 애국장(1990)을 받았습니다.
03. 결론
박현숙 장로는 한국의 예루살렘 평양에서 태어나 신앙 안에서 성장하고 끝까지 신앙으로 살아간 인물입니다. 그녀는 여학생 시절부터 신앙을 기반으로 한 나라의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여성들을 깨우치기 위한 농촌사업과 문맹퇴치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는 정치에 뛰어들어 나라를 세우는 데 앞장섰습니다. 평양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신탁통치반대운동에 나섰습니다. 1947년 월남한 이후에는 교육사업과 사회복지사업을 하면서 장관, 국회의원 등의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이같이 행동한 그녀의 모든 활동은 민족의 과제을 해결하기 위한 신앙적 응답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기독교 신앙이 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2. 기독교 신앙을 내 자신의 일터와 생활 속에서 어떻게 관련시킬 수 있는지 논의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19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3.1 운동을 이끈 자랑스러운 감리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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