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9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4월 참 신앙인의 모범 신석구 목사 성경봉독 : 마가복음 8:27~38 요절 :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가복음 8:34) 01. 서론 신석구 목사는 초지일관된 삶을 사신 목회자입니다. 젊은 시절 예수님 앞에서 다짐했던 기독교인의 신앙과 지조를 끝까지 지켜내면서 희생적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겸손하고 진실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리고 신앙과 민족을 별개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보았기에 민족이 당하는 수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 행동한 인물이었습니다. 02. 본론 신석구 목사는 1875년 5월 3일 충청북도 청주의 전통적인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충’과 ‘효’을 배우면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을 시작으로 9년 동안 할아버지, 큰아버지, 아버지, 할머니와 연이어 별세하는 이별 경험을 하면서 그의 삶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이후 방황하며 타락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여기에다 친구 김진우와 함께 시작한 전당포 사업이 망하게 되고 자신의 가족도 돌보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17년 동안의 삶을 정리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기로 하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서울에서 어느 양반집의 훈장 자리를 얻어 지내고 있는데 고향 친구 김진우가 그를 찾아왔고 그를 좇아 경기도 장단의 고랑포까지 갔습니다. 친구 김진우는 그 사이에 기독교 전도인이 되어 있었고, 그에게 “예수님을 믿으라”며 개종을 강권하였습니다. 유교적 가치관을 가진 그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친구의 전도에 3개월을 견뎌내지 못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랑포교회에 나가 처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때가 1907년 7월 14일 주일로 그의 나이 33살 때의 일입니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참으로 나라를 구원하려면 예수를 믿어야겠다. 나라를 구원하려면 잃어버린 국민을 찾아야겠다. 나 하나 회개하면 잃어버린 국민 하나를 찾는 것이다. 내가 믿고 전도하여 한 사람이 회개하면 또 하나를 찾는 것이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국민을 다 찾으면 나라는 자연히 구원될 것이다.” 교회에 출석한 지 한 달쯤 후, 순행전도사 정춘수가 고랑포교회에 설교를 하러 왔습니다. 정춘수 전도사는 같은 고향 출신이고 ‘효자’로 소문이 나 있었기에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사흘을 같이 지내면서 대화해보니 서로 마음이 통하여 친구가 되었습니다. 정춘수 전도사는 그에게 개성에서 ‘새 일’을 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신석구 목사는 곧바로 개성으로 거처를 옮겼고 의료선교사 리드의 어학 선생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1908년 3월 세례를 받은 후에는 전도사 훈련을 받기 위해 감리교 협성성경학원(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해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본격적인 전도 사업에 나서 설교와 심방을 하는 일에 종사하게 되었습니다. 1909년 2월부터는 정식으로 ‘권사’ 직첩을 받음으로 공식적인 전도인이 되어 개성•홍천•가평•춘천에서 목회하였고, 1917년 9월 24일 남감리회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신앙으로 결단하고 민족의 문제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당시 서울 수표교교회를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종교교회의 오화영 목사로부터 민족 대표로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역자로서 정치운동에 관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 “천도교는 교리상으로 보아 서로 용납키 어려운대 그들과 합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에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민족의 독립’을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늘 그래왔듯이 ‘하늘의 뜻’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고, 마침내 ‘4천 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날 아침 그는 오화영 목사에게 참가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리고는 그날 오후 1시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의 집에서 모인 기독교 대표자 회합에 참가하였습니다. 이날 대표자들은 ‘독립선언서’ 초안과 ‘독립청원서’ 초안을 본 후에 이들 문서에 서명하였습니다. 그 이튿날(28일) 저녁에는 손병희의 집에서 기독교•천도교•불교 대표자들이 함께 모여 3월 1일 거사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옮기는 결정을 하였으며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 대표 33인의 명단도 확정하였습니다. 이로써 신석구 목사는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3월 1일 태화관에서 신석구 목사 등 민족 대표 29명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언식을 시작한 직후 통보를 받은 경찰이 들이닥쳐 식은 중단되고 참석자 전원은 경무총감부로 압송되었습니다. 그후 계속된 심문과 재판에서 신석구 목사는 “나는 한일합병에도 반대하였으니 독립이 될 때까지는” 독립운동을 계속 하겠다고 조선 독립에 대한 소신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1920년 10월 30일의 결심공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형이 확정되자 미결수로 지내던 서대문형무소에서 서울 마포 공덕동의 한성감옥로 옮겨 생활하다가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소하였습니다. 각오를 하기는 했지만 투옥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고문 혹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도를 통해 “감방이 나에게는 천당같이 아름다우며 자나깨나 주님께서 내 우편에 계심을 든든히 믿으매 말할 수 없는 환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훗날 그는 “40여 년 신앙생활 중 그때의 5개월간 독방 생활할 때같이 기쁨의 생활을 한 때가 없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출옥 후에는 춘천•서울에 각각 1년씩 파송받은 때가 있었지만 주로 원산•고성•가평•철원•한포•이천•천안 등 교통이 불편하고 형편이 어려운 교회로 파송되었습니다. 일제 말기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신사가 없는 외딴 곳인 평남 용강군 신유리와 문애리에서 목회하였습니다. 1945년 5월에는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예배 및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여 용강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풀려났습니다. 해방 후에는 교회 재건에 힘쓰는 한편 평양의 민족 지도자들과 함께 북한의 민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렇지만 1946년부터는 공산 정권과 대립하여 십자가의 길을 다시 걷게 됩니다. 3.1절 기념 방송을 하면서 공산당이 작성한 원고 대신에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여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고생을 당하였습니다. 또 공산당이 주는 3.1절 공로 표창을 거부하였고, 북조선인민위원회 성립에 대해 냉소적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아 공산당의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의 신변이 위험해지자 교인들이 남한으로의 탈출을 권하였으나 “북한 땅에 남아 있는 어린양들을 이리떼 같은 공산당에게 맡기고 어찌 나의 안일만을 위해 이남으로 가겠느냐?”고 거절하고 북한 땅에 남아 고난당하였습니다. 1950년 10월 10일 평양인민교화소에서 복역하던 중 공산군에 의해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1968년 국립현충원에 이장하였습니다. 03. 결론 신석구 목사는 흔들림 없는 참 신앙인의 길을 걸은 목회자였습니다. 또 일생 동안 무명옷으로 된 한복만 입으며 청교도적인 청렴과 결백을 드러내었으며 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입으로만 교훈하지 않고 늘 몸으로 실천하였고 늘 자기의 잘못을 간증하며 눈물로 설교하던 목회자였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고난과 영광의 관계를 이야기해 봅시다.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이 나 자신에게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19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3.1 운동을 이끈 자랑스러운 감리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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