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9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2월 독립운동에 나선 기독언론인 박동완 목사
성경봉독 : 에스겔 33:1~9
요절 :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에스겔 33:7)
01. 서론
박동완 목사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이는 그가 언론이라는 매체 뒤에서 조용히 활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무기력에 빠진 당시의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기독교’와 ‘언론’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여 목회자가 되었으며, <기독 신보>, <신생명>, <한인기독교보> 등 언론을 통해 독립운동에도 적극 나섰습니다.
02. 본론
박동완 목사는 1885년 경기도 포천(혹은 양평)에서 박형순의 막내아들로 출생하였습니다. 그는 비교적 여유 있는 가정환경에서 자라 다섯 살 때부터 독선생을 두고 한문을 배웠습니다. 열세 살 때는 포천의 명문가 현석윤의 딸(현미리암)과 결혼하였습니다. 1901년 서울로 이주하여 양사동 소학교에 입학하여 신교육을 받기 시작하였고 이어 관립고등소학교•한성중학교를 거쳐 관립 외국어학교에 진학, 영어를 전공하였습니다. 외국어학교에 다니던 중 일제가 한국을 강제병합한 이듬해인 1911년 학교가 폐쇄되자 배재학당 대학부에 전입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정동제일교회에 출석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졸업 후 <기독신보> 기자로 근무하는 것으로 언론에 발을 들여 놓아 이후 문서 활동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기독신보>는 1915년 12월 8일 창간되어 1937년까지 감리교와 장로교가 연합하여 간행한 것으로 당시 한국 기독교계의 움직임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역할하고 있는 주간 신문입니다.
박동완 목사는 또 정동제일교회 전도사로도 활동하면서 최병헌• 손정도•이필주 등 정동제일교회 목사에게서 민족주의적 신앙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언론 기관에 근무하는 이점을 활용하여 사회적으로 폭넓은 교제를 이룩하였을 뿐 아니라 국외정세에도 누구보다 정확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특히 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공감하여 우리 민족도 독립에의 의지를 세상에 밝혀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그의 3.1운동 참여가 이루어졌습니다. 1919년 2월 20일경 그는 YMCA 간사이며 중앙교회의 전도사인 박희도를 기독신보사 사무실에서 만나게 되면서 3.1운동 참여를 구체화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박희도 전도사는 기독교측 독립운동가들의 연락책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박동완 목사의 강력한 독립의지는 이승훈•이필주•함태영 등 지도급 인사에게 전달되었고 마침내 27일 낮 이필주목사의 집에서 이루어진 기독교 대표자 모임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이날 회의에서는 ‘독립선언서’의 초안과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보낼 예정이었던 ‘독립청원서’의 초안을 심의하였습니다. 회의 참석자들은 문안이 완성되면 서명을 할 수 있도록 인장을 함태영 목사에게 맡겼고 박동완 목사도 독립선언서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튿날 밤에는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민족대표들의 상견례 겸 예비모임에 참석하여 3·1운동의 거사장소와 일정 등을 논의 하였습니다.
박동완 목사는 3월 1일 태화관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여 민족대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현장에서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심문과 재판에서 조선독립이 반드시 될 줄로 생각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독립운동을 할 것이라고 독립의지를 확고하게 밝혔습니다. 이로 인해 경성복심법원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2년형을 선고받아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고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근곡’(무궁화골)이라는 자신의 호의 뜻대로 한복만을 입으면서 조선이 독립하기까지 바지 대님을 매지 않았고, 당시 표준 시간은 일본 기준이기 때문에 그들의 시간에 맞추어 살지 않겠다는 각오로 자신의 시계는 항상 30분씩 늦추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는 <기독신보> 주필과 조선중앙YMCA 위원 등을 맡아 활동을 재개하였습니다. 이 때 그는 중앙YMCA 일요강화에 연사로 나서 “비록 조선이 나라를 빼앗겨 무기력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조선 민족은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뛰어난 영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민족의 독립이 가까워 왔음을 암시하며, 청년들에게 정의와 인도의 대열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한편 산업과 교육의 장려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유성준•이갑성•김윤수•장두현 등과 함께 1923년 1월 서울에서 발족한 조선물산장려회의 이사로 참여하고, 이상재가 회장으로 있는 조선교육협회에도 관여하였습니다.
1924년에는 민족적 신앙인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된 문화사업단체 ‘조선기독교창문사’가 발행하는 <신생명>의 주간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는 <신생명>에서 3.1운동 이후의 암울한 현실을 타파하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내용의 편집을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조선적 교회 설립의 필요성을 깨우치는 그의 편집이 일제의 신경을 거스르는 것이었기에 <신생명>은 1925년 4월에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1927년 2월 당시 국내의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총동원된 새로운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가 창설될 때에는 기독교계 대표로 참여하여 상임간사로 실무를 맡아 관장하면서 신간회의 전국적인 확산에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신간회의 활동과 그의 존재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일제는 서서히 체포망을 좁혀 왔습니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제대로 할 수 없음을 안 그는 해외망명을 계획하였습니다. 당시 하와이에서 목회하면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감리교의 민찬호 목사와 임두화 목사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망명을 계획, 마침내 1928년 8월 하와이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후 오아후 섬 와히아와의 한인기독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목회에 힘쓰는 한편, 교회 부설 한글학교를 확장하여 한국의 역사와 문화까지 두루 가르치며 교포 2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독립운동도 함께 추진해 나갔기에 그는 하와이 한인사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1931년 하와이학생모국방문단을 이끌고 잠시 귀국한 적이 있으며 1934년 7월에는 <한인기독교보>를 창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습니다. 그는 특히 국내의 흥업구락부와 비밀연락을 취하며 국내 민족운동을 후원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외에 거주하면서도 교회, 언론, 민족운동에 헌신하는 바쁜 세월을 보내던 중 불의의 병을 얻어 1941년 2월 23일 하와이에서 별세하였습니다. 당시 국내에 있던 가족, 친지들은 그의 유해를 들여와 장례식을 치르려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부고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한 달 후 쓸쓸하게 돌아온 그의 유골은 3.1운동 당시 고락을 같이한 동지 함태영 목사의 손에 의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으며, 1966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습니다.
03. 결론
박동완 목사는 이 나라의 암울한 현실을 타파하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기독신보>와 <신생명> 등 기독교 언론을 활용하였습니다. 1928년 미국 하와이로 이주한 이후에는 목회에 전력하면서 주체적인 기독교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신앙과 애국심, 조선 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은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자랑스러운 유산입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과제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은 무엇입니까?
2. 우리 선교회가 우리 교회와 우리 지방,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일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서로 이야기 해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19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3.1 운동을 이끈 자랑스러운 감리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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