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평신도 월례회공과 1월 학생과 교인을 위한 목회자 김진호 목사

나효선 2019. 1. 14. 22:40

기독교대한감리회 2019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월 학생과 교인을 위한 목회자 김진호 목사

 

성경봉독 : 마태복음 24:32~51

요절 :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마태복음 24:32)

 

     

01. 서론

 

금년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의미 있는 해로 여러 행사들이 진행될 것입니다.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배를 부정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과시한 운동입니다. 그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온 나라 곳곳에서 적극적인 참여로 이 운동을 이끌었고 특히 감리교인들은 민족대표 33인 중 9명에 해당할 만큼 이 운동의 중심에 섰습니다. 이로 인해 감리교인과 감리교회는 큰 피해를 당하였습니다.

올해의 공과는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자랑스러운 감리교인 12명을 다루게 됩니다. 인물의 순서는 그 역할의 순위를 정하기가 쉽지 않기에 가나다순으로 했습니다. 민족의 고통과 수난을 십자가 고난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현실을 극복하려 했던 자랑스러운 감리교인 12명을 통해 우리의 신앙적 자세를 다시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02. 본론

 

김진호 목사는 1873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한문 공부를 계속하다가 1899년 친척의 권유로 상경하여 말죽거리와 남대문 근처에서 훈장으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후,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의 애국자적 품성과 신앙에 은혜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1907년 성탄절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1908년부터 상동교회 안에 세워진 상동청년학원공옥학교에서 조선역사, 성경, 한문 등을 가르쳤습니다. 또 전덕기양기탁이동휘이동녕 등이 조직한 신민회에 참여하면서 이 몸은 내 몸이 아니오, 하나님께 바친 몸이라는 결심을 하고 민족운동의 길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1911년 상동교회 권사가 되어 전덕기 목사를 도와 교회일을 맡아 보다가 1912년 피어선성경학교와 협성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19163월부터 배재고보에서 성경과 한문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제군들은 자기 몸만 위하여 공부하는 것이 아니요 나라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이 내 몸을 주시고 나를 교육하시는 줄 믿으라면서 나의 한 몸의 성패에 곧 나라의 흥망이 달렸다고 생각하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또 배재학생기독청년회를 지도하여 학생들을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갖춘 지도자로 성장시켰습니다. 그 결과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많은 배재학생기독청년회 임원과 회원들이 학생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옥고를 치르는 희생도 감내하였습니다.

 

김진호 목사는 19193.1운동 때 서울 시내 학생들과 민족대표단을 맺어주는 연결고리 역할도 하였습니다. 당시 정동제일교회의 전도사로도 근무하던 그는 이필주 담임목사의 부탁으로 독립선언서를 서울 시내 각국 영사관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김진호 목사는 비밀을 요하는 이 일을 위해 배재고보의 믿을 만한 제자인 오흥순김동혁장용하 등을 선택하여 31일 정오를 기하여 독립선언서를 중국러시아 등 각국 영사관에 전달하게 하였습니다. 또 배재 학생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에도 참여하였습니다. 33일에는 학생들을 통해 독립운동 유인물 국민회보를 시민들에게 배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세시위가 진행되는 동안 동료 교사 강매 등과 함께 시민대회 취지문’, ‘조선독립신문’, ‘반도의 목탁같은 유인물을 만들어 서울 시내에 배포 하였습니다. 이 일로 그는 315일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그가 학교에서 체포되는 순간 정동제일교회의 그의 사택도 경찰이 수색하여 증거물을 압수당했습니다. 이 때 배재고보 1학년에 재학하던 그의 아들(김택영)이 현장에서 저항하다가 체포되어 부자가 함께 옥고를 치렀습니다.

 

김진호 목사는 경찰 조사나 재판과정에서 이필주 목사나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들과 관련된 질문은 모두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씌워진 독립운동 혐의는 당당하게 시인하였습니다. “하늘의 뜻을 따라 조선독립의 운동을 하면 민족자결주의에 의해 독립이 된다고 생각하여” 3.1운동에 참여하였다고 독립의 의지를 밝혔습니다. 그는 116일 열린 경성지방법원 공판에서 징역 7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사상불온자로 주목을 받아 생활에 큰 곤란을 겪었습니다.

 

19203월에는 인천지방 감리사 오기선 목사의 주선으로 인천 내리교회로 부임하여 교회 내의 알력을 극복하고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으며 애국부인회 회장 김마리아를 상해로 탈주시키는 일을 돕기도 했습니다.

 

19223월 아펜젤러 교장이 그를 초청해 다시 배재고보의 교사로 부임하였습니다. 이후 배재전도대를 조직하여 학생들과 같이 서울 인근 지역의 전도 활동에 나섰습니다. 서울 이태원 지역에서는 전도 활동으로 폐쇄되었던 이태원교회를 재건할 수 있었고 학생들의 모금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고 운영비용을 후원할 수 있었습니다. 홍제원에서도 전도하여 홍제원교회를 개척하고 야학도 시작하여 교회 발전의 기틀을 놓았습니다. 배재에서 196개월을 시무한 후인 19354월 당국의 감시가 너무 심하여 나이가 연로하다는 핑계를 대고 사직하였습니다.

 

1937년 다시 교회 목회 활동에 나서 서울의 궁정동교회와 삼청동교회를 맡아보면서 전도대회 등을 통해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습니다. 19406월에는 함경북도 청진에 개척 전도목사로 파송되어 만 7년을 머물면서 청진교회를 정상화시키고, 경성주을생기령어항에 감리교회를 세우고 돌보았습니다. 해방 후 한글과 역사를 가르쳤다는 것 때문에 검거되어 보안서에서 고문을 받는 등 공산당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할 수 없이 19476월 유득신 목사에게 교회를 맡기고 청진을 떠나 평양을 거쳐 해주 용당포에서 밀선을 타고 월남하고 말았습니다.

 

19479월 궁정교회에 다시 부임하여 1950년 말 피난할 때까지 시무하였습니다. 19603월 감리교선교 75주년 기념식에서 공로목사 표창을 받았으며, 그해 9월 만성위장염으로 서울 자하문 자택에서 별세하였습니다. 1998815일에는 건국 50주년을 기념하여 건국 훈장 애족장을 받고 독립유공자로 지명되었습니다.

 

한편 김진호 목사는 무화과’(설교집), ‘매일일기’, ‘병중쇄록등의 저서와 1,500편이 넘는 한문설교를 비롯한 많은 기록을 남겼습니다.(이 기록들은 한국 개화기의 교회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전덕기 목사에 관한 기록 <목사 전덕기 약사>(1922)<전덕기 목사 소전>(1949)을 저술하여 잊혀졌던 전덕기 목사를 재발굴할 수 있도록 했으며 19226월 상동교회에 건립된 고 목사 전공 덕기 기념비에 비문도 남겼습니다.

 

 

03. 결론

 

김진호 목사는 일제 시대라는 이 나라의 암흑기에 민족에게 희망을 제시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으로 당시 민족이 당하는 고난의 상황을 극복하려 하였습니다. 그 스스로가 이 민족의 희망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했기에 예수님을 세상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때로는 배재고보에서 학생들을 위한 학원 목회에, 때로는 세상에서 교인들을 위한 교회 목회에 자신의 전 생애를 다 헌신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2019년 한 해 동안 교회가 이 사회의 희망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봅시다.

 

2. 2019년에 주님께서 우리 자신과, 우리 선교회, 우리 교회에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서로 이야기해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19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3.1 운동을 이끈 자랑스러운 감리교인

 

저자 조이제 목사

충청연회 서산동지방 한샘교회 담임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위원회 위원(2000~2002)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운영위원 역임

31회 총회 역사보존위원회 위원

 

주요저서

한국감리교청년회 100년사

한국교회 인권운동 30년사

공덕교회 100년사

청파교회 100년사

한국감리교 인물사전(공저)

한국 기독교의 역사(공저)

 

 

3.1운동을 이끈 자랑스러운 감리교인 12

감독회장 전명구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기독교인 16명 중 9명이 감리교인이었으니 3.1운동은 감리교회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당시 감리교인이 된다는 것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교회는 나라 잃은 백성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하여 민족계몽과 독립운동의 내적 불길을 일으키며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조선 민족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된 민족과 하나를 이룬 감리교회였습니다.

- 머리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