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7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5과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평신도 설교자
존 세닉 John Cennick
* 성경봉독 : 사도행전 2:1~4
* 참고성경 : 요한복음 16:13~15
* 요절 :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세닉의 선조는 보헤미아에서 일어난 피의 학살을 피하여 영국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나서 후손 존 세닉은 회심을 경험한 후 웨슬리의 부흥운동에 동참하고 평신도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로 살았습니다. 특히 그의 집회에서는 웨슬리의 집회에서처럼 성령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던 많은 사람들이 사탄의 세력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평안과 기쁨을 얻고 예수님에게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존 세닉은 1718년 영국 버크셔의 리딩에서 태어나 부모가 다녔던 영국교회의 전통 안에서 성장했습니다. 9세 때 세닉은 죽어가던 고모의 선언을 들었습니다. “어젯밤, 주님이 내 곁에 섰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물로 초대하셔서 값없이 먹게 하셨습니다. 나는 장차 사자처럼 용감하게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이 말은 오랜 동안 세닉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와 동시에 구원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습니다.
세닉은 가난 때문에 13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견습공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는 일자리를 구하려고 8번이나 런던을 방문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적은 돈을 게임과 도박으로 탕진하고는 다시 돈을 마련하기 위해 거짓말과 좀도둑질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세닉은 나중에 이 시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잃어버림으로써 영원한 세대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선보다 악을 더 사랑했고 의보다 거짓을 더 많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탕아로 살던 세닉이 17세 되었을 때 갑자기 강한 영에 사로잡혔습니다. 무려 2년 동안이나 이런 상태에 있었는데 우연히 교회에 나가고부터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의인이 크게 떨지라도 주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신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망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는 “내가 너의 구원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면서, 이때 마음은 춤을 추었고 죽어가는 영혼이 소생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죄의 무게로 신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옥의 공포도 사라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랑하시며, 그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구원자 하나님 안에서 기뻤습니다.” 그가 회심을 체험한 것은 1737년이었습니다.
이때까지 그는 아직 옥스퍼드 감리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몇 개월 후, 세닉은 존 웨슬리의 옥스퍼드 친구인 찰스 킨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적인 카드 모임에서 킨친을 만났는데 킨친은 옥스퍼드에 종교적 바보가 있다고 세닉에서 말해주었습니다. 세닉은 즉시 그 바보를 만나기 위해 걸어서 옥스퍼드로 향했습니다, 세닉은 옥스퍼드에서 킨친을 다시 만나 웨슬리 형제를 소개받았습니다. 웨슬리를 만나자마자 세닉은 그 위대한 설교가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를 했습니다. 그러고는 곧 바로 영국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던 복음적 부흥운동에 가담했습니다. 이때는 웨슬리와 휫필드가 야외에서 처음으로 설교를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세닉은 곧 감리교 설교자가 되었습니다(1739년). 브리스톨 근처 킹스우드에서 갱부들의 자녀를 위한 사랑의 학교를 운영하던 웨슬리가 세닉에게 주임 교사의 역할을 맡기고, 환자방문과 성경을 강해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곧 설교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망토가 세닉의 어깨에 입혀졌습니다.
어느 날 시카모어 나무 아래에서 열린 한 집회에서 원래 오기로 했던 새미 워더라는 설교자가 늦어졌습니다. 그러자 청중들은 세닉에게 강단에 서 줄 것을 요청했고, 세닉은 첫 야외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설교를 계기로 18개월 동안 맥스필드와 험프리스처럼 웨슬리의 첫 평신도 부설교자로서 웨슬리를 도왔습니다. 그는 웨슬리의 가르침을 받아 웨슬리와 같은 두드러진 스타일로 설교했고 놀라운 결과를 얻었습니다.
집회 때마다 사람들은 광적인 사람들처럼 행동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입에서 거품을 물고 지옥의 고통을 호소하면서 자학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푼 혀와 부푼 목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저주의 말을 내뱉기도 하였습니다.
킹스우드의 한 교실에서 집회가 열렸을 때 교실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세닉은 교실이 상실된 영혼들의 거주지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밖에서는 천둥번개가 치고 있었고, 안에서는 고함과 포효가 난무했습니다. 한 여자가 자신은 사탄이라고 했고, 다른 사람은 바알세블이라 했으며, 또 다른 사람은 레기온이라고 했습니다. 확실히 그들은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실 안에서 달리기를 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세닉은 웨슬리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별 반응이 없던 사람들이 점차로 조용해지면서 행동도 자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기도하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울면서 자신의 구원을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점차 평온을 찾았고 결국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집회가 끝났습니다.
세닉은 웨슬리의 영향 하에서 이렇게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감리회 초창기 평신도 설교자였습니다. 하지만 존 세닉은 너무 젊은 나이인 36세에 런던에서 열병으로 서거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영국 첼시아에 있는 모라비안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존 세닉은 예수님을 믿고, 웨슬리의 파송을 받아 평신도 설교자로 일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감동적으로 전하는 위대한 복음 설교자로서 헌신했습니다. 그가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더 많은 업적을 남겼을 것이지만, 그 나이에도 더 오래 산 사람들도 하지 못할 만큼의 많은 일을 했습니다. 평신도로서 안수 받은 목사들보다 오히려 더욱 성령에 사로잡혀서 능력으로 복음 전도에 헌신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또한 찬송시 작사가로서 많은 찬송시를 지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복음의 불을 지르는 역할을 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신앙생활을 위해 성령의 능력이 왜 필요한지를 나누어 봅시다.
2.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에게 어떤 능력이 임하는지, 그리고 그 능력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지 생각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17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웨슬리의 후예
평신도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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