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7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4과 흑인 인권신장의 선구자
조셉 필머 Joseph Pilmore
* 성경봉독 : 마태복음 25:34~40
* 참고성경 : 시편 146:6~10
* 요절 :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것이니라(마 25:40)
조셉 필머는 존 웨슬리를 만나 회심하고 평생 웨슬리의 신앙사상을 따른 사람입니다. 그가 특히 관심을 가진 것은 소수자들이며 약자인 흑인의 인권신장이었습니다. 흑인들의 권리를 세우는 데 관심을 기울인 것은 성경에 충실한 것이었고, 약자에 대한 웨슬리의 신앙적 관심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조셉 필머는 1739년 영국 요크셔 지방의 타드마우스에서 성공회 신자인 부모에게 태어났습니다. 16세에 감리교회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님을 알게 되었고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브리스톨 킹스우드웨슬리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라틴어 희랍어 희브리어를 배웠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웨일즈와 콘웰을 순회하면서 감리회 초창기 평신도 선교사이면서 복음 설교자로서 지도적인 위치에서 사역했습니다.
1769년 리즈에서 열린 감리교 회의에서 리처드 보드맨과 평신도 미국 선교사로 자원하였습니다. 존 웨슬리는 미국의 감리회 사역을 강화하기 위해 두 명의 평신도 설교자들을 파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들은 웨슬리 목사님이 공식적으로 파송한 미국의 첫 감리회 설교자였습니다. 둘은 1769년 10월 21일 미국 뉴저지 글라우세스터에 도착했고, 1772년까지 필라델피아와 뉴욕에서 4개월 간격으로 번갈아가며 설교를 하였습니다. 필머는 펜실베이니아의 저먼 카운티들과 메릴랜드의 북부 카운티들을 비롯하여, 볼티모어 주 아나폴리스 등 여러 지역들을 순회하면서 복음전도자이며 설교자로 사역했습니다. 1772년 12월, 필머는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첫 번째 감리교 설교를 하면서 기독교 복음전도를 위한 ‘문이 활짝 열렸음’을 감지했습니다. 그래서 1773년, 필머는 자신이 순회했던 도시들을 역순으로 돌면서 복음을 전하고, 1774년 1월에 보드맨과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그의 메시지는 짤막하지만 강렬했습니다.
1784년까지 필머는 사역을 멈춘 채 조용히 지냈습니다. 하지만 웨슬리가 1784년에 감리교의 실제적인 독립선언서인 ‘선언령’(Deed of Declaration)을 발표하자 필머는 웨슬리 목사님을 떠났습니다. 그는 감리회와 성공회의 분리를 반대했지만 이 선언은 지속적인 감리회 운동을 언급함으로써 영국국교회와 분리되는 근거를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분리는 웨슬리 목사님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실마리가 되었고 마침내 웨슬리 사후에 분리되었습니다.
웨슬리와 결별한 필머는 미국으로 되돌아가서 1785년 11월에 미국의 뉴 프로테스탄트 에피스코팔교회의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감리교 설교자였던 조셉 필머는 1786년부터 다른 교단의 목회자가 되어 1821년 은퇴할 때까지 필라델피아 연합교구, 성바울교회, 뉴욕그리스도교회에서 사역하였습니다.
필머가 성바울교회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1790년에 자유 아프리카 공동체가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습니다. 필머는 노예제도를 강하게 반대하였는데, 10년 전 필라델피아 흑인 공동체의 혜택을 받은 퀘이커교도였던 안토니 베네젯의 조카와 결혼하면서, 그 신념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필머는 아프리카 공동체를 사랑하여 자선을 베풀었고, 황열병이 유행하던 1793년에도 그들 곁에서 일했습니다. 1789년에서 1794년 사이에 31쌍이 성바울교회에서 결혼했는데 필머는 그들이 환영받도록 애써 주었습니다.
필머는 에피스코팔교회의 필라델피아 성서학원 부총장을 지냈으며 펜실베이니아에서 프로테스탄트 에피스코팔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의 이런 노력을 높이 평가한 펜실베이니아대학교는 1807년에 필머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위해 그리고 인종차별에 맞서서 성실하게 일했던 필머는 1825년에 필라델피아에서 서거했습니다.
필머는 비록 웨슬리를 떠났지만 그의 신앙적 기초와 자세는 웨슬리에게서 배운 그대로였을 뿐 달라지거나 첨삭된 것이 없었습니다. 특히 필머가 흑인들의 인권신장에 앞장선 것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차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웨슬리의 신앙적 태도를 배운 것입니다. 필머가 에피스코팔 목사가 되어서도 여전히 선교에 앞장선 것은 웨슬리의 선교정신을 그대로 이어 받았기 때문입니다.
조셉 필머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에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존 웨슬리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선교에 앞장섰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구도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웨슬리의 신앙 사상을 따라 인권신장에 앞장 섰습니다. 특히 그가 흑인들의 인권신장에 기여한 것은 그 후에 일어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킹 목사는 흑인으로서 흑인들의 권리 찾기에 앞장섰지만, 필머는 백인임에도 오직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바탕으로 약자인 흑인들의 인권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필머는 오늘의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초석을 놓은 웨슬리의 후예입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조셉 필머는 약자인 흑인들의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약자는 누구일까요?
2. 성경이 말하는 약자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방법을 이야기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17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웨슬리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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