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9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10월 하나님 사랑과 민족 사랑의 모범 최성모 목사
성경봉독 : 요한복음 12:20~36
요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01. 서론
최성모 목사는 하나님에게 선택되어 붙잡힌 목회자입니다. 처음에는 기독교를 반대하였지만 믿기로 결단한 이후에는 민족의 수난 때마다 하나님 사랑과 민족 사랑을 어떤 형태로 실천해야 하는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 모범의 정점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 되어 적극적으로 3.1운동을 이끄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02. 본론
최성모 목사는 1874년 서울 안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에 정진하여 1888년 14세라는 어린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고 진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의 아내 김씨는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상동교회에 출석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주님을 믿는다’는 의미의 김주신으로 바꾼 인물이라고 합니다. 김주신은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의 가족과 이웃에게도 전도하고 있었기에 그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9대 독자인 그의 아들에게 “너의 어머니는 어리석은 아녀자이니까 교회에 나가나 너는 사내 대장부이니 교회에 나가서는 아니 된다”고 엄히 경고하면서 기독교에 물들지 않도록 단속할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그를 선택하여 사용하셨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어지러운 나라 정세가 계속될 즈음 그는 우연히 상동교회 앞을 지나다가 교회 입구에 걸려 있는 시국대강연회 포스터에 이끌려 교회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여기서 한복을 입고 열변을 토하는 전덕기 목사의 강연을 들으면서 그는 큰 감화를 받았으며 마음속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즉 하나님 사랑과 민족 사랑의 관계를 처음으로 터득했던 것입니다. 그는 곧 집으로 돌아가 그의 일생에 있어 가장 중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배재학당에 다니던 아들을 불러 가위를 가져오게 하고 직접 소중히 지켜왔던 상투를 자른 후 “이제부터는 나도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나는 기독교를 통해서 나라의 독립을 지키는 일에 헌신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날부터 상동교회에 아들과 함께 출석하기 시작 했습니다.
1908년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감리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전덕기 목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신앙생활에 힘쓸 뿐 아니라 신민회 회원과 YMCA 지도자로도 크게 활동하였습니다. 1912년부터 서강교회 자원 전도인으로 교역에 나갔습니다. 당시 최성모 전도사에게 신앙지도를 받았던 최석주 목사는 그에 관하여 “그의 설교는 웅변이 있고 해학이 섞인 이야기로서 젊은 사람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감명 깊은 말씀으로 들렸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선생은 젊은이들에게 꿈을 넣어주었고 또 한편으로 용기를 넣어주어 선생이 서강교회에 계신 동안 일본으로 공부한다고 나간 사람이 4~5명이나 되었다”고 술회하였습니다.
1913년에는 신홍식•장락도 등과 함께 협성신학교를 2회로 졸업하였고, 1914년 연회에서 정식으로 파송되어 서강교회를 자립 교회로 성장시켰습니다. 동시에 YMCA 명강사 중의 한 사람으로 전국을 다니며 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1916년 3월 12일에는 집사 목사로 안수를 받은 후 해주읍교회로 파송받았습니다.
최성모 목사는 해주읍교회에 시무하던 중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1919년 2월 25일 서울로 올라온 후 이필주 목사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박희도 전도사를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전해 듣고 흔쾌히 찬성하여 기쁜 마음으로 3.1운동에 참여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원래부터 독립에 뜻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조금의 주저도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후 이필주 목사를 설득하여 3.1운동에 참여하도록 하였습니다. 2월 26일 오후 2시에는 한강 인도교 근처의 일본인 식당에서 거사 장소(파고다공원)을 확인하고 기독교측 대표자 명단 등을 논의하였습니다. 2월 27일 오후 1시에는 정동제일교회 이필주 목사의 집에서 모인 기독교 대표자 회합에 참가하여 ‘독립선언서’ 초안과 ‘독립청원서’ 초안을 본 후에 이들 문서에 서명할 기독교 대표 명단을 확정하였습니다. 2월 28일 아침에는 박희도• 신홍식•이필주 등을 만나 운동 진행 사항을 들었고, 같은 날 저녁에는 손병희의 집에서 기독교•천도교•불교 대표자들이 함께 모여 3월 1일 거사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옮기는 결정을 하였으며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 대표 33인의 명단도 확정하였습니다.
그는 3월 1일 태화관의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재판과정에서는 “여러 피고인들 중에 선생이 제일 쾌활하고 방청석을 바라보면서 아는 체까지 할 만큼 여유 있는 태도를 보였다”고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자신의 소신과 투철한 독립의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사람은 인도, 정의, 자유에서 생존하는 것인데 우리 조선 사람은 자유가 없다. 그것은 물론 저작, 행동의 자유가 없음은 물론, 언론과 교육의 자유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고등보통학교가 있을 뿐 기타 중학도 없으며 대학은 물론 없다. 이러한 제도는 조선 사람을 완전히 예속적 존재로 만들려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인은 일본 신민이 아니므로 일본 사람과 조선 사람 사이에 차별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기타에도 열거할 점이 많지마는 일일이 진술하지 않겠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 조선 사람을 부르기를 ‘요보’라고 하며 아주 비열한 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우리 조선 사람의 감정을 해하는 일이 적지 않다. 이런 등등의 일로써 나는 물론 병합에 절대 반대하였으니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의지는 평소부터 품어왔었다.”
이러한 재판 과정을 거친 후 1920년 10월 30일의 결심 공판에서 징역 2년을 언도받았습니다. 이후 경성감옥에서 고난을 당하다가 1921년 11월 4일 만기출옥했습니다.
출옥 후 최성모 목사는 곧바로 서강교회를 시무함으로 다시 목회에 나섰고, 1922년 9월에는 자신의 모교회인 상동교회로 파송 받아 2년간 시무하면서 예배당을 수리하여 분위기를 새롭게 할 뿐 아니라 설교로도 교인들을 감동시켜 교회의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못하여 1924년 만주로 가서 목회와 항일투쟁을 병행하였습니다. 1926년 다시 국내로 들어와 천안교회와 예산교회에서 시무하다가 다시 만주로 나가 활동했습니다. 1937년 3월 14일 수원에서 별세하였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고 2006년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치되었습니다.
03. 결론
최성모 목사는 봉건적 사상에 물들어 있었지만 주님을 믿게 되면서 큰 결단을 한 인물입니다. 자신의 과거 삶의 상징이었던 상투를 단번에 잘라버리고 기독교를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이후 신민회와 YMCA를 통해 활동하다가 1914년부터 본격적인 목회 활동에 나섰고, 1919년에는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하여 나라의 독립을 위한 밀알이 되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이곳에 어떤 기독교 인물들이 안장되어 있는지를 조사해 봅시다.
2.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을 다룬 영화를 감상하고 그 느낌을 이야기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19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3.1 운동을 이끈 자랑스러운 감리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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