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2019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9월 구 한국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필주 목사 성경봉독 : 시편 8:1~9 요절 :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4) 01. 서론 이필주 목사는 정동제일교회 등에서 시무했던 감리교의 대표적인 목회자입니다. 그리고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입니다. 그의 생애는 기독교 입교 이전과 이후의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기독교 입교는 그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그의 삶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증거하는 삶이었습니다. 02. 본론 이필주 목사는 1869년 서울 정동(혹은 남창골)의 퇴락한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한문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나 가난으로 학업을 계속치 못하고 생계를 돕기 위해 제사공업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1886년 6월 부친이 별세하자 모친과 네 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의 책임을 감당했습니다. 여기에다 자신도 흑사병에 감염되어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빠졌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그 후 4년여 동안 생을 비관하여 타락과 방탕의 길로 들어섰고, 계속되는 주색잡기로 몸과 마음을 망치고 허송세월만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1890년 정신을 가다듬고 자진하여 구한국 군대에 입대, 5년간 사병으로 복무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군기를 준수하고 기예를 자습하여 평가 시험 때마다 좋은 성적을 올려 계속 진급이 되었습니다. 1895년 동학란 진압에 출전하여 전라도 전주와 완산접전에서 승리하였고 일본식 군대훈련과정을 마쳐 참교가 되었습니다. 훈련대에 속하여 청일전쟁도 겪었고 시위대로 전보되면서 부교로 승진, 그 후 6년간 러시아군대의 훈련도 받았습니다. 한편 1899년에 29세의 늦은 나이에 결혼한 김인숙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으나 1902년 어느 날 늦게 얻은 자녀 둘을 한꺼번에 모두 잃는 불행을 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인생의 허무함을 깊이 체험하며 심한 고통에 빠졌습니다. 당시 그는 자녀들의 죽음과 고통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면서 자신을 질책하며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이러한 때에 예수를 믿으면 무슨 고난을 당하든지 안심이 되고 위로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동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돈독치 못한 신앙으로 부하 20~30여 명을 거느리고 취미삼아 다녔으나 1년 후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기독교 회심의 기회를 만나게 되어 그의 삶이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하루 밤에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 내가 죽어 시체를 입관하여 놓고 내가 시체를 향하여 경계하기를 ‘네 죄로 인하여 이렇게 죽었느니라’ 하고 비감한 말을 하다가 깬 일이 있었다. 그 후부터 나는 주색잡기를 온전히 끊고 아직 담배만 끊지 않고 기도를 힘써하고 세례 문답 공부와 개인전도에 힘을 많이 썼다.” 1903년 4월에는 스크랜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후 군생활을 정리하고 전도사업에 헌신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상동교회에서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며 개인전도에 열중했고 1904년 사경회 공부를 끝내고 속장이 되었으며 그 여름에는 권사가 되었습니다.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가 청년학원을 설립하자 동 학원의 체육담당 교사가 되고 1904년부터 공옥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았습니다. 1907년 봄에는 청파동에 기도처를 마련하고 저녁마다 다니며 열심히 전도하여 연화봉교회(현재의 청파교회)로 발전시켰으며 그해 4월에 전도사 직첩을 받았습니다. 이어 협성신학교 2년 과정을 마치고 1913년 3월 지방회의 파송을 받아 왕십리교회에서 5년 동안 시무하였으며, 1915년 4월 25일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1918년 6월 정동제일교회로 부임하여 활동하다가 1919년 3.1운동에 기독교의 대표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이필주 목사는 2월 25일 자신을 찾아온 해주의 최성모 목사로부터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앞서부터 국권을 회복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즉시 찬성하였습니다. 이러한 결단으로 그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집을 2월 27일 정오에 열린 기독교계 예비모임 장소로 제공하였습니다. 이때 참석자들은 ‘독립선언서’ 초안과 ‘독립청원서’ 초안을 검토하였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할 지역 책임자를 선정하고 16명의 기독교계 민족대표 명단을 확정하였습니다. 2월 28일 밤 손병희 집에서 민족대표들의 마지막 모임을 마친 이필주 목사는 집으로 돌아와 가족예배를 드린 후 그제야 가족에게 자신이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하게 되었음을 알렸습니다. “나는 내일부터 나라를 위해 내 몸을 바칠 것이니 가족들이 이에 대해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다. 지금으로서는 나라를 찾는 게 급선무 아니겠는가? 그 동안 왜놈 밑에서 나라 없이 살아왔는데 우리가 그걸 찾기 위해 운동하는 것이다” 하고 가족에게 말하였습니다. 3월 1일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태화관의 독립선언식에 참석했다가 곧바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평생 민족대표로 참여한 이 감격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후 그는 3월 1일을 한국을 위한 날로 생각하였고, 3.1절이 되면 반드시 3일 동안 금식하면서 이 날을 기념하였다고 합니다. 심문 과정에서 그는 앞으로도 “언제까지든지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면서 “조선은 독립국이다. 조선인은 자주민이란 것을 생각하고 어디까지나 그 의사를 발표하려고 한 것이다. 우리들의 힘이 있는 한 조선의 독립에 다 함께 노력하자”고 독립의 의지를 확실하게 천명하였습니다. 이후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 결심공판에서 징역 2년을 언도받아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하였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기도와 명상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을 구하라’는 큰 소리를 듣고 성경을 읽어나가던 중 갑자기 환한 전깃불이 켜지는 것 같았으며 자신을 사로잡았던 두려움이 사라지는 깊은 신앙적 체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출옥 후 곧바로 서울 미아리교회로 부임, 인근 3개의 교회를 맡아 시무하였고 1922년 9월에는 서울 연화봉교회(청파교회의 전신)로 옮겼으며 이후, 서울의 서강•염창•창천•왕십리 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934년 3월 연회에서 65세로 은퇴하였습니다. 그러나 은퇴 후에도 건강하고 목회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았기에 그는 원로목사란 직책으로 남양교회에 파송되어 1942년 4월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교인을 위로하며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에는 자신과 교인들이 신사에 가서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허리는 굽힐지언정 마음만은 굽히지 맙시다”라고 교인들을 격려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편 이필주 목사는 출옥 후 독립운동의 일선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하였습니다. 그 구체적인 예가 1922년 12월 총독 및 고관을 암살하고 관공서를 폭파할 목적으로 국내에 잠입한 김상옥 의사를 1주일 동안 자신의 집에 숙식하게 하면서 거사를 준비하게 한 일입니다. 김상옥 열사는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쫓기다가 자결한 독립운동가입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1969년 4월 21일 남양교회에 ‘이필주 목사기념비’가 건립되었습니다. 한편 1966년 6월 그의 유해는 남양교회 묘지에서 동작동 국립묘지 순국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습니다. 03. 결론 이필주 목사는 일관되게 기독교인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전염병으로 두 자녀를 한꺼번에 잃고 낙심해 있다가 전도를 받으면서 기독교인이 되었고 이후 목회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동시에 나라의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기에 3.1운동의 민족대표로 선정될 수 있었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2. 나 자신이 신앙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어떤 경우였는지를 이야기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19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3.1 운동을 이끈 자랑스러운 감리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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