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도봉지방 여름성회

나효선 2010. 8. 30. 15:15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도봉지방 여름성회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도봉지방 선교부 주최 여름성회가

반석교회(김규현 목사 시무)에서 열렸다.

 

일시 : 2010년 8월 23일(월) 저녁 ~ 25일(수) 저녁

강사 : 윤보환 목사 (시흥 남지방 영광교회 시무)

 

 

김진섭 감리사님(대망교회)

 

선교부 총무 : 윤상걸 목사님(창동교회)

 

김규현 목사님(반석교회)

 

특별 찬양

도봉지방 여선교회 찬양대

 

도봉교회 찬양대

 

반석교회 찬양대

 

주제 : 『회개의 사람, 축복의 사람』

설교 : 윤보환 목사님

 

회개() : 통곡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태복음 26장 69 -75절)

 

베드로와 유다를 비교

둘 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팔은 사람들이다.

그 후

베드로는 통곡을 하였다.

유다는 목매어 죽었다.

통곡은 회개를 가져다준다.

회개의 사람이 되면 축복의 사람이 된다.

‘베드로 통곡교회’에서 겟세마네 동산이 보인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베드로가 통곡하였고,

믿음의 주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지도록 기도하신 겟세마네 동산이 확 눈에 보이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통곡하였다.

베드로는 회개를 통해서 예수님의 승천의 자리에 갈 수 있었다.

유다의 경우 ‘힌놈의 골짜기’에서는 성전에 의해 가려져 겟세마네 동산이 보이지 않는다.

유다는 예수님의 승천의 사건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오순절에 제자들이 성령 충만함으로 부르짖음을 유다는 경험하지 못했다.

성령을 받으면 인생이 달라진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신다.

통곡하고 눈물로 기도하라.

베드로는 통곡하고 기도하여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면 고독의 기도가 될 텐데 하나님이 얼굴을 내미셨다. 하나님이 들어주셨다.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졌다.

 

통곡이고 회개의 기도로 하나님이 휘장을 찢으시고 얼굴을 내미신다.

예수님의 눈물의 부르짖음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여 마음에 부흥이 일어나면 눈물이 난다.

성령을 구하라. 성령의 사람이 되자.

 

 

 

회개() : 참회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한복음 8장 1 -11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왔을 때

예수님이 글을 쓰셨다.

〔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신명기 22장 24절) 〕

1. 남자는?

여자만 끌고 오고 남자를 놓쳤다.

율법에 둘 다 쳐죽여야 하는데 남자가 없어졌기에 무죄이다.

2. 성전을 더럽힌 죄

율법을 잘 아는 어른으로부터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성전을 더럽힌 자’들이다.

율법을 잘 아는 어른으로부터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참회가 없었기에 진짜 죄인이다.

진짜 회개는 누가 했는가?

간음한 여인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회개했다.

예배하는 자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여기는 자이다.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지 않으면 온전한 예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장 16절)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베드로전서 2장 9절)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이 여인은 성전을 더럽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남자를 놓치고 여자만 끌고 성전에 들어왔다.

성전을 더럽힌 죄는 여자를 끌고 온 사람들이 지었다.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여자를 끌고 왔다.

성전에서는 온유하고 겸손이 있어야 한다. 교만하면 안 된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민수기 20장 10 -11절)

모세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반석을 두 번 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율법을 잘 알수록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베드로는 두 배에 가득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 것을 버리고 온유와 겸손으로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을 따라간 그 순간부터 삶의 가치가 달라졌다.

하나님 안에서 차원이 달라졌다.

하나님 말씀은 어려워도 지키고 남을 넘어뜨리려고 왜곡시키지도 말라.

 

회개의 사람은 축복을 받는다.

의인이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왔지만 참회하지 않았다.

죄지은 여자는 참회를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지켜서 온유와 겸손으로 순종하자.

용서받은 죄인이 성전의 복을 받는다.

죄인이지만 주님 때문에 의인이 되었다.

 

 

 

회개() : 헌신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요한복음 12장 1 -8절)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다.

마르다는 분주했다.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봉사 = 서비스(service) = 워십(worship) = 예배

교회에 준비할 일이 많아서 분주한 마르다 같은 사람이 있다.

예배시간에 왔다 갔다 하지 말라. 식사 준비하느라 축도를 놓치면 안 된다.

“곧 내가 기도할 때에 이전에 환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다니엘 9장 21절)

시작과 마무리가 중요하다.

마감의 예배(오후 또는 저녁 예배)를 드려야 불을 피운 것이다.

주일 성수한 것이다.

예배를 위해서는 시작과 끝이 명확해야 한다.

준비하는 것이 많지만 분주해서는 안 된다.

좋은 것을 택하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요 11:21-23)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지금 · 오늘’ 살아나리라.”

예수님이 “무덤의 돌을 옮겨놓으라”

마르다는 “벌써 냄새가 납니다.” 이는 ‘인본주의’이다.

마르다의 신앙은 죽은 신앙. ‘나사로는 죽었다’ 이다.

예수님을 보았지만 마지막 날 부활 때를 보았다.

세상의 냄새를 가지고 교회를 왜곡시키지 말라.

“잠자는 나사로야, 나오라.”

마리아의 신앙 : 산 신앙. 나사로는 잠자다가 깬 것이다.

마르다는 우선순위가 바뀌었고 말씀을 듣기는 들었지만 왜곡하여 들었다. ‘내 생각’이 들어갔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았다. 예수님이 천국에 가는 예비자가 되었다.

마리아는 회개하고 자신을 돌아보았더니 오빠를 살려주신 예수님에게 한 것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이 헌신이다.

옥합을 딱 깨서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을 때가 헌신이다.

예수님이 장례를 통하여 천국을 간다.

유대 풍습은 손님으로 오신 왕이 자기 집에 들어갈 때 머리와 발에 향유를 부어 예의를 표하였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셨다.

요한복음 14장 2절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천국의 집 주인은 마리아가 된 것이다.

천국의 집 주인이 되는 것은 헌신이 있어야 한다.

삼백 데나리온은 대단히 큰돈이다.

안드레와 빌립이 왜 수제자가 될 수 없었는가?

다 남의 것을 가지고 일했다.

교회는 돈 갖고 일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믿음 갖고 일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내 생각, 내 규모에 딱 맞는 일을 하려고 한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등 남의 것으로 생색을 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를 쓰신다.

베드로는 ‘말씀 = 예수님 = 레마’ 의 믿음이 있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집중해서 듣고 헌신했다.

기도 · 몸으로 헌신할 수 있지만 옥합을 깨지 않으면 헌신할 수 없다.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마가복음 14장 9절)

마리아는 말씀에 집중하고 실천하는 헌신으로 위기의 순간에 오빠를 살릴 수 있었다.

물질의 헌신으로 교회(성전)를 세우고 사역하는 자를 세운다.

좋은 편을 택하고 우선순위를 분별하여 질서를 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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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령의 역사

첫째 날 저녁집회 처음 통성기도를 하는 시간에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머리와 이마의 경계부분을 무언가가 ‘쿵’ 하며 쳤다.

느낌은 무척 강했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예기치 않았던 안수를 받았다.)

누가 그런 것인가?

윤보환 목사님이 앞에서 방언하시는 위치는 변함이 없는 것 같은데…

(돌아다니며 몇 사람에게 안수를 하신 것인가?)

눈을 떠서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또 내 뒤쪽에서 세차게 찬바람이 불어왔다.

에어컨 바람이 부분적으로 강하게 불어올 수는 없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온 것이다.

 

2. 하나님의 섭리

둘째 날 저녁집회

일찍 교회에 갈 준비를 했는데 사탄의 역사로 인하여 이 일 저 일이 생기고,

현관을 나가니 빗방울이 떨어져서 다시 올라가서 우산을 가지고 내려와서 가는데

그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마음을 다스리며 교회에 가니 아래층에는 들어갈 수가 없어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렇게 된 것이 오히려 잘 되었다.

도봉교회 찬양대의 배치가 사진을 위층에서 찍어야 잘 나올 수 있는 형태였다.

 

나는 이미 나철진 목사님이 방언하는 것을 들었고, 안수도 여러 번 받았다.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심을 이미 체득하고 있다.

윤보환 목사님의 부흥성회 운영은 낯설었다.

방언과 치유를 위한 안수, 헌금한 사람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하는 것 등으로

나의 ‘고질적인 이성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순발력이 없다.

새로운 경험을 하면 한참 곱씹어 보아야 이해를 한다.

사진을 정리하면서

윤보환 목사님의 애쓰시는 정성이 느껴지게 되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