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평신도 월례회공과 5월 나라의 독립을 위한 목회 신홍식 목사

나효선 2019. 5. 30. 03:11

기독교대한감리회 2019년 평신도 월례회공과

5월 나라의 독립을 위한 목회 신홍식 목사

 

성경봉독 : 이사야 6:6~13

요절 : 내가 또 내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사야 6:8)

    

             

01. 서론

 

신홍식 목사는 전형적인 목회자였습니다. 호쾌하고 우렁찬 음성의 설교는 항상 영감이 넘쳐났고 교인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민족의 고난당하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동시에 평양 남산현교회 담임목사였던 그는 인근 지역의 목회자들을 설득하여 평양 지역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이도록 하였습니다. 그에게 3.1운동 참여는 목회의 한 과정이었습니다.

 

 

02. 본론

 

신홍식 목사는 1872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났습니다. 13세에 시율을 저작하고 16세에 사서삼경을 독파할 정도로 한문 수학에 탁월한 재능을 있었기에 25세까지 과거공부에 몰입하였습니다.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자 방황하다가 장사를 시작했으나 실패하여 빚 독촉에 시달리는 등 궁핍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1904년 기독교를 통해 재물을 얻으려는 불순한 의도로 청주읍교회를 찾았다가 오히려 성경을 통해 죄를 깨닫고 회개한 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1906년 스웨어러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충북 보은군 보은교회 권사로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직산, 연기, 공주 등 충청도 지역에서 목회하다가 1917년 평양의 남산현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신홍식 목사는 평양에서 3.1운동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해 215일 경 손정도 목사에게서 오산학교 설립자 이승훈 장로가 평양 감리교 기흘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이때 이승훈의 나라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천당에 갈 수 있소. 이 백성이 지옥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목사들만이 천당에서 편히 앉아 내려다 보겠소?”라는 주장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신홍식 목사는 장로교 길선주 목사와 함께 그 동안의 독립 운동 소식을 접한 다음 의기 투합하여 독립운동 참여를 결심하였습니다. 이후 거사를 추진하기 위해 219일 서울로 올라와 YMCA 간사인 박희도 전도사의 집에서 이승훈정춘수오화영오기선 등 기독교 진영 민족 대표 모임에 참석하여 장감 연합 및 천도교와의 공동연대 문제를 논의한 후 222일 평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신홍식 목사는 남산현교회 부목사인 박석훈 목사, 이향리교회 김찬흥 목사, 이문리교회 주기원 목사, 신양리교회 김홍식 목사 등과 접촉하여 이들이 독립운동 기간 동안 평양 지역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했습니다. 225일에는 서울을 다녀온 안세환을 통해 서울 준비 상황을 전달받았고, 같은 날 진남포교회 홍기황 전도사에 이를 알려 진남포에서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권하였습니다.

 

227일 그의 어머니에게 이것이 마지막 뵈옵는 것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생명을 건 것입니다하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에 그의 어머니는 오냐, 사나이를 낳아서 목숨을 나라를 위하여 바친다니 참으로 영광스럽고 기쁜 일이 아니겠느냐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서울로 올라왔고, 기독교측 비밀회합에서 기독교대표 16인 중의 1인으로 선정되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늘은 조선을 독립시켜 줄 것이며 또한 우리는 정의를 주장하고 있으므로 일본은 당연히 조선을 독립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일본은 동양의 평화를 역설하고 있으나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려면 조선의 독립이 필요한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습니다. 31일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가하였다가 현장에서 체포당했습니다.

 

평양에서도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가 벌어졌습니다. 228독립선언서를 입수한 평양에서는 남산현교회 교인들과 기독교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주도하여 이를 다량 인쇄하였고 또 태극기도 제작하였습니다. 31일에는 감리교와 장로교 등 종교 단체 별로 장소를 달리하여 만세시위가 일어났습니다. 감리교의 경우는 남산현교회에서 박석훈 목사, 김찬흥 목사, 주기원 목사 등의 인도로 진행되었습니다. 선언식을 마친 감리교인들은 남산재 언덕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부른 후 시내 쪽으로 행진하여 장로교인들과 합세하였고 이에 시민과 학생들이 합류하면서 대규모 군중 시위로 발전하였습니다. 시위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고, 이를 막기 위해 경찰과 헌병이 발포를 하여 사상자까지 나왔습니다. 이후에도 시위는 며칠 동안 계속되었고, 평양 외곽과 평안도 일대로 확산되었습니다. 이 시위로 평양에서 4백여 명이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고, 박석훈 목사는 고문으로 건강을 해쳐 결국 1116일 옥중에서 순국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보통 6월에 열리던 연회가 11월이 되어서야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평양지방 무어 감리사가 평양지방회를 개최하려고 할 때 어느 한국인 목사 한 명이 금년 지방회는 감옥에서 개회하면 좋겠다. 이렇게 말한 까닭은 금번 조선독립운동으로 인하여 감옥에 있는 목사, 전도사, 권사, 속장, 학교교사, 주일학교교사 합이 160명이라고 보고할 정도로 평양 지역의 독립운동은 교회가 주도하였고 그만큼 교회가 받은 피해도 컸습니다.

 

체포된 신홍식 목사는 재판을 받으면서도 나는 한일합방이 발표되던 날부터 독립운동을 계획하였고 이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는 내 뜻을 굽히지 않겠다고 외쳤습니다. “피고는 항상 일한 합병에 불평을 품고 조선 독립을 희망하는가?”라는 재판장의 질문에는 물을 것도 없는 것이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으로 되는 것이니 어찌하나 하고 참고 있었으나 차차 일본 정부의 참혹한 비인도적인 태도와 총독정치의 압박과 핍박이 시시각각으로 고통을 주어 견디지 못하게 절박하여지므로 그저 있지를 못함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서 조선 독립의 사상이 날로 더 가슴에 부글부글 끓게 되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결심공판에서 2년형을 선고받아 경성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갇혀있으면서도 성경 연구와 기도 생활로 일관하다가 1921114일 만기 출옥하였습니다.

 

신홍식 목사는 출옥 후에도 끊임없이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에 힘을 보태는 삶을 살았습니다. 1922년에는 인천 내리교회 담임목사로 파송되어 다시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듬해 <인천 내리교회의 역사>를 기술하여 인천 선교의 역사를 정리하였고, 1927년부터 강원도 강릉지방과 원주지방 감리사로 활동하면서 구역의 교회를 관리할 뿐 아니라 남북 감리교회의 통합에도 관여하였습니다. 1929년에는 <영적재판><장수옹>이란 전도 책자를 저술하였습니다.

 

19334월부터는 급성 풍단병(風丹病)으로 고생하다가 1935년 목회 일선에서 은퇴하였습니다. 은퇴 후에는 원로 목사로 원주 및 청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39318일 노환으로 별세하였습니다. 그는 고향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03. 결론

 

신홍식 목사는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의 독립을 추구한 신앙운동가였습니다. 그는 나라의 수난이란 상황 속에서 기독교인이 되었기에 이를 신앙운동으로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도 독립운동을 계획하였고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는 그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생명까지도 걸려고 했던 그의 의지는 특히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신앙운동과 독립운동(혹은 사회참여운동)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시위 현장에 참여한 후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를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 2019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3.1 운동을 이끈 자랑스러운 감리교인